박정희 전 대통령은 모내기철마다 농촌을 찾았다. 햇볕에 탄 듯 까만 얼굴에 밀짚모자를 쓰고 논두렁에 주저앉아 농민들과 더불어 막걸리를 즐겨 마셨다. 스스로 농민의 아들이라고 했던 그의 옷차림은 영락없는 농부였다. 이런 대통령의 모습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도시에 비해 가난하고 소외된 농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농민 대통령’의 이미지가 만들어낸 카리스마는 새마을운동과 농정 개혁을 추진하는 데도 큰 힘이 됐다.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내기 행사에 가지 않았다. 대통령으로서는 12년 만에 이명박 대통령이 20일 경기 안성시의 한 농촌 마을을 찾아 농민들과 함께 모내기를 했다. 이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최원병 농협중앙회장에게 “농민을 위한 농협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농협이 농민들의 원성을 듣지 않도록 솔선해서 개혁에 나서 달라는 주문이다.
▷이 대통령이 농협 개혁에 대해 언급한 것은 벌써 여러 번이다. 작년 12월 4일 새벽에 가락동 농수산물시장을 찾은 이 대통령은 “농협이 금융에서 몇조 원씩 벌어 사고나 치고 있다”면서 “농협이 번 돈을 농민을 위해 어떻게 쓸 것인지 머리를 써야 한다”고 말했다. 올해 3월 뉴질랜드를 방문했을 때도 “뉴질랜드는 보조금 없이도 경쟁력 있는 농업혁명을 이룩했다”며 농협 개혁을 줄곧 강조하며 수행했던 장태평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에게 강력한 개혁을 지시했다.
▷하지만 농민을 위한 농협 개혁은 아직 시동도 걸리지 않았다. 대통령이 누차 거론하고 장관에게 지시했는데도 개혁 대상인 농협중앙회는 요지부동이다. 모내기 현장에서 이 대통령에게 ‘농민을 위한 농협’이 돼 달라는 주문을 받은 최 회장은 22일 “농협은 정부 산하기관이 아니다”며 “시간을 두고 농협 스스로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올해 안에 마무리 짓는다는 정부 방침과는 딴판이다. 최 회장은 “신용사업과 경제사업 분리 등 개혁을 2017년에 하려고 하더라도 17조 원을 적립해야 하는데 10조 원이 모자란다”고 했다. 대통령이 말로 개혁을 외쳐 봐야 별 효과가 없을 것 같다. 모내기 일손 돕기도 좋지만 농협을 제대로 뜯어고치는 것이 농촌을 살리는 지름길일 텐데, 현실은 암담하다.
박영균 논설위원 parky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