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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길]경제개발의 길목에서

입력 | 2009-05-27 02:49:00

대통령 임기는 7년에 중임은 할 수 없고, 대통령은 5000명 이상으로 구성되는 선거인단이 선출하도록 한 내용 등을 담은 8차 헌법 개정안이 1980년 10월 23일 국민투표에 부쳐져 91.6%의 찬성률로 통과됐다. 국민투표를 이틀 앞둔 21일, 국민투표에 대한 담화문을 발표하는 남덕우 국무총리.


헌법 개정

국무총리로 취임한 지 4일 후인 9월 6일, 개헌심의위원회 제9차 전체회의를 주재하게 됐다. 이는 그동안 요강작성 소위원회가 마련한 개정안에 대한 최종 심의이고 10월 중 국민투표에 부칠 예정이라는 것을 실무자의 보고를 받고 알았다. 따라서 8차 회의까지의 심의 경위는 전혀 알 수 없고 다만 그해(1980년) 3월에 최규하 대통령이 헌법개정심의위원회를 발족시켰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최 대통령은 지나치리만큼 신중하게 국사를 처리하는 분으로 박정희 대통령 유고 후 대통령 권한대행을 거쳐 유신헌법에 의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이다. 그분은 유신 체제가 종말을 고한 만큼 민주화의 방향으로 헌법을 개정하고 평화적 정권 교체를 실현하는 일이 그의 역사적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국의 장래를 위해서는 미국식 대통령 책임제보다 프랑스의 이원집정제가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3월에 헌법개정 작업에 착수하고 당면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1980년 1월 18일 남북 총리회담을 제안했다. 5월에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를 방문해 몸소 에너지 외교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박 대통령의 군인통치 아래에서 살아온 군부 지도자들은 나라가 미증유의 위기에 처했다고 우려해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대통령으로 추대할 수밖에 없다는 의견으로 쏠리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최 대통령은 전두환 장군에게 집권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8월 16일 하야 성명을 냈다.

이러한 역사적 격변기에 국무총리로 취임한 나는 헌법개정안이 최종 단계에 이르렀으니 이른 시일 안에 작업을 마쳐 달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제8차 헌법 개정안은 1980년 10월 23일 국민투표에 부쳐졌고 95.5%의 투표율과 91.6%의 찬성률로 통과됐다. 새 헌법은 유신헌법의 잘못된 부분을 시정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신장하는 한편 삼권분립을 명확히 하는 등 긍정적인 면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는 5000명 이상의 선거인으로 구성되는 선거인단이 선출하는 간접선거 방식을 택했고 대통령 임기는 7년에 중임은 할 수 없는 것으로 규정했다.

기본권 신장-3권 분립-간선제 골자

헌법개정안 10월 국민투표로 통과

1981년 전두환 대통령 5共출범

새 헌법에 따라 1981년 2월 11일 대통령 선거가 실시됐다. 정당별로 4명의 후보가 출마했으나 3당이 후보단일화에 실패하자 민정당의 전두환 후보가 선거인단 5272명 가운데 90% 이상의 득표로 제12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그러나 노태우 대통령 후보의 6·29선언을 계기로 대통령 직선제로 이행하는 제9차 헌법개정 작업이 뒤따랐고 이로 인해 노태우 후보는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제8차 개정헌법이 시행된 후 그 부칙에 규정된 ‘국가보위 입법회의 설치령’이 문제가 돼 민주화추진협의회라는 재야정치단체로부터 고발당해 나는 검찰 조사를 받게 됐다. 문제의 부칙은 개정 헌법이 시행과 동시에 유신헌법이 폐지되고 국회의원의 임기도 끝나는 것으로 돼 있었다. 따라서 선거를 통해 새로운 국회가 소집될 때까지 입법 기능이 없어진다. 이에 대처해 신헌법은 1980년 5월 설치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령’을 ‘국가보위 입법회의 설치령’으로 개정해 새 국회가 소집될 때까지 입법 기능을 대행케 한다고 부칙에 명시했던 것이다. 나는 이 부칙에 따라 국무회의에서 설치령 개정안을 의결한 것인데 그것이 국회의 권능을 유린하는 내란행위에 해당한다 하여 관련자들과 함께 고발을 당하게 된 것이다. 검찰 조사를 받고 무혐의로 끝났지만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김대중 씨에 대한 질문에 간략히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의 나의 진술이 신문에 보도됐으므로 다음 회에 정확한 사실을 말해 두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