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삼간다는 뜻의 三復白圭란 성어는 ‘논어’ ‘先進(선진)’편의 이 章에서 나왔다. 南容은 성이 南宮(남궁), 이름은 适(괄) 혹은 b(도), 字는 子容(자용)이다. 그래서 南宮子容이라 불렸는데 두 글자를 줄여 南容이라 했다. 이미 ‘公冶長(공야장)’편에서 공자는 그를 두고 “나라에 도가 있으면 버려지지 않고 나라에 도가 없어도 벌이나 죽음을 면할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이 장에서는 남용이 말을 신중히 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을 높이 평가했다. 공자는 남용이 늘 말을 조심했으므로 나라에 도가 있으면 등용되고 나라가 혼란스럽더라도 형벌을 받지 않으리라 확신한 듯하다.
三復은 세 번 거듭 외운다는 말이다. 圭는 장방형이되 윗부분이 뾰족한 瑞玉(서옥)이다. 白圭는 희고 깨끗한 圭인데 여기서는 ‘시경’ 大雅(대아)에 들어 있는 ‘抑(억)’편의 한 구절을 말한다. 곧, “白圭之점(백규지점) 尙可磨也(상가마야) 斯言之점(사언지점) 不可爲也(불가위야)”이니, “흰 구슬의 흠은 오히려 갈아서 고칠 수 있지만, 이 말의 흠은 갈아 고칠 수 없네”라는 뜻이다. 兄之子의 子는 남녀 통칭이다.
‘사기’ ‘孔子世家(공자세가)’에 보면 공자가 周나라로 가서 老子를 만났다고 한다. 정약용은 당시 함께 간 南宮敬叔(남궁경숙)이 곧 남용이라고 보았다. 단언하기 어렵다. 다만 노자가 했다는 말은 새겨둘 만하다. “총명하고 깊이 살피면서도 죽임을 당하는 사람은 남을 비난하기 좋아하는 자이고, 넓은 지식과 언변을 지니고도 몸을 위태롭게 하는 사람은 남의 악을 들춰내는 자이다”라고 말했다. 子貢(자공)도 駟不及舌(사불급설)이라 했다. 공자도 노자도 愼言(신언)을 가르쳤거늘 이토록 말조심이 어려운 것은 어째서인가?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