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음모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김대중 씨(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1981년 1월 23일 대법원은 김 씨에게 사형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고, 판결 다음 날 전두환 대통령은 특사권을 발동해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김대중 사건
5·18민주화운동 이후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상태에서 김대중 씨가 내란음모 혐의로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고 있었다. 당시 해럴드 브라운 미국 국방장관이 일본에 왔다가 한국에 들러 1980년 9월 3일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대사와 함께 전두환 대통령에게 지미 카터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그날로 돌아갔다. 미 국무부와 우리 정부는 보도진에 친서의 내용을 밝힐 수 없다고 말했지만 그것이 김대중 씨의 재판에 관한 것임은 명백했다.
그런데 바로 6일에 김대중 씨 선고공판이 열린다는 것이었다. 취임한 바로 그 다음 날 이러한 보고를 받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당시 김대중 씨 재판에 대해 미국 조야에서는 비판 여론이 들끓고 있었다. 그래서 카터 대통령이 특사를 보낸 것인데 특사가 다녀간 지 며칠 후에 선고공판을 하면 외교상의 문제는 없는 것일까. 생각 끝에 최규하 전 대통령을 찾아뵙고 자문을 하기로 했다. 그분은 일언지하에 “그것은 안 되지요”라고 말씀하셨다.
그건 그렇다 하더라도 판결이 나면 국내에 일대 소란이 일어나고 한미관계가 냉각될 것인데 그것이 더 큰 문제였다. 생각 끝에 대통령을 면담하려 했으나 때마침 대통령은 전남의 수해지역을 순시 중이었다. 국방부 장관을 찾았더니 그도 그곳에 가 있었다. 청와대 직통전화로 김경원 대통령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6일에 군법회의가 있다는 것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모른다고 했다. 김 박사도 나와 동시에 취임했기 때문이다. 사정을 이야기하고 대통령에게 군법회의 연기를 건의해 달라고 부탁했다. 30분 후에 전화가 걸려 왔는데 총리가 알아서 하라는 지시였다. 곧바로 유학성 중앙정보부장을 불러 경위를 이야기하고 연기 조치를 하도록 했다.
다음 날 노태우 보안사령관을 점심을 같이하자며 총리공관으로 초청했다. 노 사령관은 전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사이인 것으로 나는 알고 있었다. 노 사령관에게 우리의 진정한 적은 김대중 씨가 아니라 김일성인데 김대중 씨를 처형하면 국내에 소란이 일어나고 한미관계가 극도로 악화돼 결국 김일성을 기쁘게 만드는 것이 아니냐고 설득했다. 노 사령관은 내 말이 맞다 고 하며 대통령에게 건의해 보겠다고 대답했다.
다음에 신병현 부총리, 김경원 비서실장과 함께 대통령에게 건의하기로 했다. 그 당시 청와대는 유병현 씨(이후 주미대사가 된다)를 통해 전 대통령의 방미를 추진하고 있었다.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대통령 후보를 만나게 되면 반드시 이 문제를 제기할 것인데 레이건 후보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할 것인지도 생각해두어야 했다.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듣자 전 대통령은 “대통령이라고 해서 사법 절차에 간섭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우리는 간섭할 수 없지만 판결 후에 사면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연기했던 군법회의는 9월 18일에 다시 열려 사형을 선고했다. 그 후 대법원에 상고했고 1981년 1월 23일 대법원은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그러자 전 대통령은 24일 특사권을 발동해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전 대통령은 28일 미국으로 건너가 레이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해서 주한미군 철수 계획을 백지화했고 김대중 씨는 1982년 말 형집행정지로 석방돼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