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水라열차’ 타고 남이섬 들러
‘몸과 표정의 예술’ 공연장으로
31일까지 시내 곳곳 축제마당
꼭 한 번쯤 강원 춘천에 가 보고 싶었다.
‘지난 사월 춘천에 가려고 하다가 못 가고 말았다’로 시작해 ‘오늘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로 끝나는 고(故) 피천득 작가의 수필 ‘인연’의 느낌 때문이었을까. 춘천은 왠지 단아한 얼굴을 한 장소일 것 같았다.
그런데 춘천과는 그동안 인연이 없었다. 그저 춘천 가는 열차에 몸을 싣기만 하면 될 것을…. 그동안 요상하게 비켜간 춘천과의 인연은 24∼31일 열리는 ‘춘천마임축제’로 올해 드디어 맺어졌다. 그 곳은 축제의 장소였다.
○ 춘천 가는 열차와 잠깐의 남이섬 외도
올해로 21회째를 맞은 춘천마임축제에 가게 됐을 때, 이 축제 인터넷사이트(mimefestival.com)에는 생소한 단어들이 많았다. 개막식 날 도심 전체를 물로 덮는 난장인 ‘아! 水라장’, 이날 서울 청량리 역을 출발해 남이섬에 들렀다가 춘천마임축제 개막공연을 보고 돌아오는 열차인 ‘아! 水라열차’, 축제 폐막 3일 전인 금요일(29일) 밤 내내 거리공연이 펼쳐지는 ‘미친 금요일’, ‘우리 다함께 마임에 미치리’란 뜻에서 소설가 이외수 씨가 지었다는 ‘우다마리’ 광장…. 축제의 장소엔 이렇듯 축제 고유의 말들이 있었다.
24일 아수라열차를 탔다. 오전 7시 20분 청량리 역을 출발한 무궁화 열차 한 칸이 아수라열차다. 50대 노부부를 비롯해 꼬마들과 나들이 나온 30대 부부, 여대생들이 탑승 손님이다. 1인당 2만4900원(남이섬 입장료 8000원 포함)인 이 프로그램으로 오전 9시 20분 가평역에 내려 버스와 배를 갈아탄 뒤 남이섬에 도착했다. 2시간 40분의 자유시간! 이 섬의 소유회사인 ㈜남이섬이 얼마 전부터 ‘나미나라공화국’이라고 이름 지어 브랜드화시킨 이곳은 아기자기하게 볼거리가 많았다. 2월부터 우주선 모양의 ‘인어공주호’를 만들어 육지와 남이섬을 잇게 하고, 중앙잣나무길 곳곳엔 아이 키 높이의 외국 동화책들도 세워 두었다. 드라마 ‘겨울연가’로 유명해진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을 호젓하게 거닐어보았다. 온몸에 와 닿는 오월 바람과 햇볕이 상쾌했다.
○ 춘천마임축제 아! 水라장 개막공연
낮 12시 반 춘천 명동 도착. 유명한 명동 닭갈비골목에서 닭갈비와 막국수로 시장기를 달랜 뒤 오후 1시부터 명동 M백화점 앞거리에서 시작된 ‘아! 水라장’ 개막공연을 지켜봤다. 이날 개막공연은 당초 예정돼 있지 않던 한 프로그램으로 시작됐다. 전날 갑작스럽게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해 이를 추모하는 공연이 열린 것. 유진규 춘천마임축제 예술감독이 흰 상복을 입고 살풀이 공연을 하자 분위기는 경건해졌다. “축제를 통해 슬픔을 승화하도록 해요. 그대, 이제 천국의 문을 두드리세요.”(장중 안내 멘트)
‘아! 水라장’이 시작됐다. 어느새 거리를 가득 메운 춘천 시민들과 외국인들은 5층짜리 건물 옥상에서 자원봉사자들이 뿌리는 형형색색 비닐우비를 손에 받아 입었다. 공연자들이 대형 호스로 물을 뿌려대자 남녀노소 흠뻑 물에 젖어 흥겨운 놀이판이 됐다.
“물의 도시 춘천에는 수호신인 수신(水神)이 살고 있다. 그런데 춘천을 넘보는 화신(火神)이 쳐들어와 1년에 한 번씩 커다란 싸움인 ‘아! 水라장’이 벌어진다. 도깨비들은 온 힘을 다해 수신을 도와 화신을 실신시켜 중앙로 화산 속에 가둬버린다. 그러던 중 수신은 ‘공지어의 전설’을 들려준다. 춘천 공지천에 사는 ‘공지어’란 물고기 9999마리를 만들어 불태우면 도깨비들이 우주까지 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것. 화신을 자유롭게 해 주는 조건으로 공지어를 만들어 태우지만 딴 생각을 하는 일부 도깨비 때문에 우주로 돌아가는 길은 결국 열리지 않고, 화신은 내년에 보자며 사라진다.”(유재천 사단법인 춘천마임축제 이사장)
춘천마임축제는 이렇듯 신화적 요소를 차용해 하나의 커다란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냈다. 공지어란 전설 속의 물고기를 설정해 작가 7명이 짚으로 만든 물고기들을 갤러리에서 전시하고, 시민들과 자원봉사자들이 만든 종이 공지어들을 거리 곳곳에 걸어뒀다. 폐막식인 31일 이 물고기들은 ‘우다마리’에서 불태워질 예정이다.
○ 마임은 마음, 그리고 힘 있는 몰입
‘마임은 춘천의 마음입니다. 눈부신 몸의 잔치, 행복한 꿈꾸기’란 문구를 새긴 버스가 눈앞을 지나갔다. 사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마임이 막연히 어려웠다. 그동안 춘천이 막연히 먼 곳으로 느껴졌던 것처럼…. 25일 춘천인형극장에서 열린 호주 ‘맨 오브 스틸’ 팀의 ‘쿠키커터와 친구들’(공식 초청작), 강원대에서 ‘찾아가는 공연’으로 열린 국내 극단 ‘필통’의 ‘물싸움’과 일본 ‘지다이’의 ‘마녀 광대’, 춘천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러시아 ‘블랙스카이화이트’ 팀의 ‘곤충들의 천문학’(공식 초청작)이란 공연들을 보면서 조금씩 마임에 눈 뜨게 됐다. 배우들의 몸짓과 표정이 워낙 풍부해 공연이 무언(無言) 또는 의성어로만 소리를 전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기 일쑤였다. 특히 공식 초청작이었던 ‘곤충들의 천문학’은 배우들이 소름끼치도록 기괴한 괴물과 기어 다니는 동물들을 표현해내고 있었다. 인간의 몸짓과 상상력으로 이토록 공포와 아름다움을 함께 전달할 수 있다니…. 마임은 몰입의 예술이었다.
마임(mime)은 흉내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미모스’(mimos)로부터 시작돼 로마시대엔 ‘판토마임’(panto-mime)이라 불리며 각광을 받았다. 17세기 프랑스 이후 완전한 무언극 형태로 발전해 현대 마임은 신체극, 오브제극, 비주얼극, 총체극 등으로 불리며 다변화되고 있다. 요즘엔 마임이 시처럼 함축적인 예술표현을 한다면, 판토마임은 이야기 중심으로 사회적 상황을 희극적 구성과 묘사적 연기로 표현하는 차이점이 있다. 모두 몸을 감정 표현 수단으로 삼기 때문에 매우 힘 있는 형태의 예술이다. 어쩌면 마임 배우가 아닌 평범한 우리들도 일상에서 몸짓과 표정으로 더 많은 메시지를 타인에게 전달하고 있지는 않을까.
춘천마임축제는 31일 폐막 때까지 각종 마임공연을 펼친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로 25일 오후부터 29일까지 거리공연과 ‘미친 금요일’ 행사는 취소돼 예년에 비해 축제 규모는 줄었다.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말처럼, 축제는 인간사 희로애락이 함께 섞여 화합하는 장(場)일테다. 이번 주말 춘천에 가면 이 축제에 동참할 수 있다. 소양강 늦봄 경치도 아름다울 것이다.
춘천=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