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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

입력 | 2009-06-02 12:30:00


권력은 휘둘러야 제 맛이다.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들 때, 인간은 권력에 매혹된다. 그리고 한 번 쥔 권력을 잃지 않으려고 밤낮없이 투쟁한다. 권력이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안 됩니다.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으시겠어요."

끝없이 올라가는 도도한 목소리, 민선이다.

석범은 급히 복도를 달려 대기실 앞으로 갔다. 경호로봇에게 겹겹이 둘러싸인 민선이 고함을 질러댔다.

"이제 곧 시합입니다. 어느 누구도 대기실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돌아가 주세요."

걸걸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봐. 내가 찰스야. 찰스가 누군 줄 알아? 바로 '배틀원 2049' 주관방송사인 의 주인이다 이 말이야. 찰스가 시합 전에 출전 로봇들을 잠깐 격려하겠다는데, 안 된다고? 넌 대체 뭐야?"

이번에는 앨리스가 받아쳤다.

"물러나십시오. 글라슈트 팀에서 싫다고 하지 않습니까?"

앨리스를 노려보는 찰스의 두 눈에 비웃음과 분노가 뒤섞였다.

"단발머리! 또 너야? 재수 없는 새끼들! 보안청의 경호 따윈 필요 없다고 분명히 알렸을 텐데. 불청객이 예서 뭘 하는 게야?"

투웅!

찰스의 변신다리가 바닥을 세게 쳤다. 세렝게티와 보르헤스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 지만, 민선은 오히려 한 걸음 나서며 맞대응했다.

"이쪽 세 분은 글라슈트 팀에서 초청했어요. 됐습니까?"

찰스의 변신 다리가 빙글빙글 돌면서 천천히 떠올랐다. 당장이라도 민선의 턱을 후려칠 기세다. 찰스 곁에 서서 불호령을 듣고만 있던 사내가 앞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난 서울특별시 문화체육청장 고호중이라고 합니다. 다크호스로 각광받기 시작한 글라슈트를 격려하기 위하여 왔습니다. 긴 시간 뺐지 않겠습니다. 1분 아니 30초 정도의 만남은 지나친 요구가 아니라고 봅니다."

고위 관료답게 상대를 자극하지 않으면서 실리를 얻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볼테르에게서 단단히 명령을 받은 탓인지, 민선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청장님! 시합이 끝난 후 따로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돌아가 주십시오."

고 청장의 얼굴이 한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가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떨리는 음성과 끝이 말려 꺾이는 말투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노민선 박사! 뭔가 착각을 하고 있나본데, 나는 문화체육청장으로서 특별시의 체육관련 업무를 모두 관장합니다. '배틀원 2049' 역시 문화체육청에서 후원하는 행사이지요. 박사는 내가 시합 전에 잠깐 글라슈트를 만나는 일이 위법이라고 생각합니까?"

법을 따질 문제는 아니었다.

"그럼 비켜나세요. 청장 직권으로 저 문을 열고 들어가야겠습니다."

괜한 고집이고 자존심이었다. 문화체육청장의 업무가 얼마나 많은가. 5분 단위를 시간을 쪼개 써도 빠듯한 것이 청장의 일상이다. 그런데 청장의 책무 운운하며 글라슈트를 만나고야 말겠다는 것이다. 청장도 혹시 이번 시합에 판돈을 걸었을까.

"안됩니다. 청장님!"

민선이 게걸음으로 고 청장의 앞을 막아서자, 찰스의 변신다리를 삼중톱날이 불쑥 튀어나와 감쌌다. 그리고 크게 반원을 그린 변신다리가 그녀의 옆구리를 채찍처럼 때렸다. 앨리스가 경호 로봇들에게 달려드는 것과 석범의 강철구두가 어지럽게 휘돌았으며 병식도 주먹을 내지르며 나아갔다. 석범의 강철구두가 찰스의 등을 후려치자, 찰스의 변신다리가 퉁투웅 더 크게 흔들리며 울렸다.

다행히 경호 로봇들은 살상모드로 전환되지는 않은 듯, 앨리스의 매서운 발길질과 병식의 주먹세례를 받으며 쓰러지고 뒹굴면서도 즉각적이고 치명적인 공격을 펴진 않았다. 그러나 로마병정처럼 포위망을 점점 좁혀오는 것만으로도 앨리스와 병식 그리고 석범에겐 충분한 위협이었다. 갈비뼈를 다쳤는지 민선은 엎드려 끙끙 앓는 소릴 해댔고 꺽다리와 뚱보 역시 엉덩방아를 찧은 채 일어설 줄을 몰랐다.

둘 뿐이라면 퇴로를 미리 정하고 싸움을 유리하게 이끌겠지만, 로봇 앞에서 무기력하게 쓰러진 사람이 벌써 셋이다. 석범과 앨리스와 병식은 등을 맞댄 채, 다가오는 경호로봇들을 노려보았다.

일촉즉발의 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