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669)에 이어 공자와 제자 季路(子路)의 대화가 이어진다. ‘논어’ ‘先進(선진)’ 편의 같은 章을 둘로 나누어 보았다. 이번 대화는 죽음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敢問死에서 敢問은 자신보다 윗분에게 어떤 사항을 질문할 때 공손하게 여쭙는 어법이다. 주어는 앞에 나왔던 季路다. 曰 이하는 공자의 말이다. 앞에서 子曰이라 했으므로 여기서는 子를 생략했다. 한문의 대화문에서는 뒤에 나오는 曰의 주어를 생략하는 일이 많다. 未知는 ‘아직 ∼을 모른다’, 焉知는 ‘어찌 ∼을 알겠는가’이다.
공자는 은나라의 上帝 관념, 주나라의 天命 사상과 禮 이념을 계승하되, 하늘에 대한 관심을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런데 공자가 高弟인 子路에게조차 귀신과 죽음의 문제를 명료하게 설명해 주지 않은 사실을 두고 呑棗(탄조)에 가깝지 않나 의심할 수 있다. 탄조란 골륜呑棗(골륜탄조) 혹은 渾淪呑棗(혼륜탄조)를 줄인 말이다. 음식물을 씹지 않고 그냥 넘기는 것을 혼륜탄이라 하는데, 대추를 씹지 않고 그냥 삼키면 맛을 알 수 없듯이 학문을 논하면서 조리를 분석하지 않고 모호하게 처리한다는 말이다.
주희는 공자가 (렵,엽)等(엽등)을 경계했다고 풀이했다. 즉, 삶과 죽음, 생명의 시원과 종말은 본래 같은 이치이지만 배움에는 순서가 있어서 등급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천명했다는 뜻이다. 주희는 이렇게 말했다. “성의와 공경으로 사람을 섬기지 못한다면 반드시 神을 섬길 수 없을 것이며, 시초의 근원을 추구하여 태어난 연유를 알지 못한다면 반드시 종말로 돌아가서 죽음의 의미를 알 길이 없을 것이다.” 정약용도 주희의 해설을 존중했다. 지금은 역시 인간답게 살아가는 문제를 더 생각해야 할 때이다.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