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코트뒤론 와인 르포
“보르도는 와인을 팔고, 론은 와인을 만든다.”
지난달 29일 프랑스 비엔의 한 식당에서 만난 피에르 장 빌라 씨(레뱅드비엔 공동대표)는 론 와인을 간명하게 소개했다. 와인의 명성과 상업적 성공은 보르도에 뒤졌지만, 와인의 품질만은 보르도 이상이라는 자부심의 표현이다.
다양성과 개성. 코트뒤론(Cotes du Rhone) 와인의 키워드다. 보르도에 이어 프랑스 와인 생산량 2위인 발레뒤론은 알프스산맥과 마시프상트랄(중앙산맥) 사이 론 강 유역의 계곡.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의 총칭이 코트뒤론이다. 발레뒤론은 북부(비엔∼발랑스)와 남부(몽텔리마르∼아비뇽) 지역으로 나뉜다. 가파른 비탈이나 테라스(다랑밭)에서 생산되는 북부 와인은 대부분 단일 포도품종. 완만한 언덕이나 평지인 남부 와인의 90% 이상은 두 개 이상의 품종을 섞어 만든다.
“론와인은 레드와 로제가 13개, 화이트 품종이 8개지만, 3개만 꼽으라면 시라 그르나슈 무르베드르죠. 대표품종은 역시 시라입니다.”
앵테르론(Inter-Rhone·발레뒤론와인협회)의 마케팅 담당 오렐리 그르예 씨는 26일 론와인의 최대 장점은 다양한 테루아르(토양)와 품종, 농부의 개성이라고 소개했다.
프랑스 북부의 대표 아펠라시옹은 샤토그리예, 생페레, 생조제프, 코르나스, 코트로티, 콩드리외, 크로즈에르미타주, 에르미타주. 남부는 샤토뇌프뒤파프, 타벨, 리라크, 바케라스, 지공다스가 버티고 있다. 한 번쯤은 들어본 유명한 AOC(원산지 통제 명칭)들이다.
그렇다면 론와인의 명성은 왜 보르도나 부르고뉴 와인의 그늘에 가렸을까.
가장 흥미로운 답변은 28일 에르미타주에서 만난 네고시앙 ‘폴 자볼레’의 수출책임자 크리스토프 브뤼네 씨의 해석이었다.
“와인의 가장 큰 시장인 영국은 보르도가 선점했고, 더 먼 역사를 따지자면 14세기 아비뇽유수 때 교황들의 사랑을 부르고뉴가 차지했죠.” 하지만 그는 로마의 식민시대부터 척박한 비탈밭에 포도를 경작한 노하우와 역사 및 전통, 품종의 다양성에 현대적인 마케팅기법을 적용한다면 “론와인의 미래는 밝다”고 낙관했다.
○ “땅과 포도알과 와인이 생생히 살아있다”
26일 AOC 바케라스의 포도농가 ‘도멘 몽티리우스’.
에리크와 크리스틴 부부는 13년 전부터 비오 디나미(bio-dynamie) 농법을 쓴다고 소개했다. 유기농법인 ‘비오’ 농법은 병충해 구제를 위해 황, 구리를 제한적으로 쓰지만, 비오 디나미는 이마저도 쓰지 않는 완전한 자연친화적 농법이다.
“지금 스무살이 된 큰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항생제 없이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늘 잔병치레를 했어요. 그 아이가 학교 갈 무렵부터 비오 디나미 농법으로 바꾸었고, 이젠 포도밭도 아이들도 건강해졌습니다. 땅과 포도알과 와인이 살아있다는 걸 생생하게 느끼지요. 이 모든 것은 우리들만의 진실입니다.”
이들은 오크통 숙성도 거부한다. 전통적인 저장고(c´ement)에서 양조와 숙성을 한다.
“오크통 숙성은 테루아르의 표현을 감추는 인위적인 방법이 아닐까요. 포도알 자체만으로 견과류와 빵 굽는 냄새처럼 다양하고 자연스러운 향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연과 고집이 빚은 와인… “다양성-개성으로 승부”
하지만 이런 파격적인 농법과 숙성방법이 론 지역의 주류는 물론 아니다. 한 네고시앙의 관계자는 자신들이 관할하는 총경작지의 5%만 비오 농법을 쓰며, 이 중 10%만 완전한 비오 디나미 농법을 실험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현재의 비오 디나미 농법은 경제성 문제로 실험 수준에 머물고 있지만 가까운 미래에는 대세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 와이너리 견학하고 홈스테이
해발 700m인 덩텔드몽미라이의 7분능선쯤에 AOC 지공다스의 오스피스 마을이 있다.
수 억 년 전 해저였던 이 지역은 각종 어패류의 화석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곳의 와인은 싱싱한 해산물과도 잘 어울렸다. 12세기 사라센의 침공에 대비해 산 중턱에 조성된 이 곳은 프로방스의 아름답고 고즈넉한 전형적인 전원마을이다. 몇 해 전부터 포도농장과 양조, 숙성창고를 견학하고 민가에서 홈스테이를 하는 에노투어리즘으로 각광받고 있다. 덩텔드몽미라이 둘레를 산책하거나 자전거투어를 하고, 암벽등반을 즐길 수도 있다.
“주민 600명 중 85% 이상이 와인산업에 종사해요. 조금 과장하면 몇 사람 빼곤 다 친척이죠.”
지공다스의 홍보책임자 엘로디 루 씨가 마을 분위기를 얘기해줬다.
“한국에서는 ‘옆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안다’고 표현한다”고 대꾸하자, 그녀는 재미있는 비유라며 웃었다.
론밸리엔 1년에 250일 북풍이 분다. 한겨울 최고 시속 140km의 미스트랄. 포도밭의 농부들은 혹독한 추위와 광풍을 견디며 가지치기를 한다. 하지만 6, 7월의 미스트랄은 고마운 바람이다. 특히 비온 후에 이 바람이 불면 포도나무는 몸을 뽀송하게 말려 병충해를 물리친다고 한다.
와인농가의 농한기는 언제일까.
“우리들은 쉬지 못해요. 1년 사계절 매일 바쁘게 돌아가지요. 하지만 날마다 휴가이기도 해요. 이렇게 늦게까지 저녁을 먹으며 수다를 떨잖아요. 포도 수확 전 1주일간 마음껏 먹고 마시며 힘을 쌓아둡니다. 이때 가까운 지역으로 여행을 다녀오기도 하고요.”
지공다스 와인협회장 피에르 아마디유 씨는 자부심과 회한이 뒤섞인 얼굴로 와인잔을 부딪쳐왔다. 땅과 자연에 순응하는 농부의 마음은 국적이 없다.
○ 사르코지 대통령 너무합니다
론 지역을 포함한 프랑스 와인업계는 ‘프렌치 패러독스’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취임 후 음주 측정과 광고심의가 강화됐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주류 광고는 최근까지도 전면 금지됐고, 음주를 유도하는 와인광고 역시 방송광고 심의대상이다. 한마디로 와인 광고를 보며 음주욕구를 느끼면 안 된다는 게 심의의 골자. 와인 광고는 와인 제조와 관련된 인물이 등장해 테루아의 특성, 포도품종, 빈티지 등 와인병에 적힌 내용을 설명하는 것만 허용된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화목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와인광고도 심의에 걸린다.
“사르코지에게 실망했어요. 자신의 문화와 테루아를 존중해야 합니다. 정상회담에서 와인으로 건배하는 장면을 방송이나 신문에서 보도할 수 없다니. 스페인에서는 코리다(스페인 전통 술) 광고를 허용하는데, 왜 프랑스에서는 와인 광고를 하면 안 됩니까.”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던 피에르 장 빌라 씨의 관자놀이에 파란 핏줄이 돋고 얼굴에서 목까지가 벌게졌다.
“그래도 (그의 부인) 브루니는 예쁘지요.”
그는 겸연쩍은 듯 조크로 흥분을 수습한다. 프랑스 금주론자들과 와인업계 사이의 논문 대결에 이은 광고 대결. 구경꾼으로서는 흥미로울 수밖에.
○ “와인의 민주화가 일생의 모토”
지금 론밸리에선 포도 수확량을 조절하기 위해 필요 이상의 새싹은 벌써 잘라냈고, 기둥(에샬라)에 철사줄로 가지를 묶는 손작업이 한창이다. 올해는 포도나무의 성장이 빠른 편이라고 한다. 포도꽃이 피고 100일 후면 수확이다.
이기갈과 샤프티에는 론지역의 양대 네고시앙인 동시에 샤토나 도멘을 직접 경영하며 포도를 재배하는 거대 와인기업이다. 그러나 결국 코트뒤론 와인의 개성은 수백 개의 작은 도멘의 실험정신과 고집이 만들어가고 있다.
“모든 와인을 알기에는 내 인생이 너무 짧아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좋은 와인이란 자신이 마셨을 때 기쁨을 느끼는 와인이랍니다. 미국의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 씨의 점수 따위는 잊어도 좋습니다. 자신만의 느낌이 중요하니까요. 와인의 민주화가 저의 모토 중의 하나인 이유입니다.”
지난달 28일 저녁 에르미타주의 식당 ‘르망즈뱅’에서 만난 줄리 캄포스 씨(카브 드탱 임원)는 30여 년 전에 모국인 잉글랜드를 떠나 보르도와 부르고뉴를 거쳐 론밸리에 정착한 용감한 여성 경영인이다.
“프랑스에서 와인은 수프와 같은 음식이지만, 아시아에서는 고상한 술로 인식되기도 한다니 참 흥미롭지요. 중국은 아직 와인의 레이블, 명성을 중시하며 유행과 지위를 과시합니다만 일본은 와인 자체와 와인의 다양성을 봅니다. 이미 (일본은) 와인에 대한 상식과 지식을 갖춘 셈이죠.”
한 네고시앙의 수출 책임자는 한국시장에 대한 평가는 쏙 빼놓고 이렇게 말했다. 과연 우리는 중국과 일본 중 어느 쪽에 가까울까.
글=발레뒤론 이지훈 기자 jhlee@donga.com
디자인=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AOC(Appellation d'origine controlee): 프랑스의 원산지 통제 명칭. 원산지 명칭을 사용하려면 프랑스 정부에서 정한 규정을 지켜야 한다. 그 지역에서 재배된 포도일 것. 포도 품종과 숙성도, 와인의 알코올 도수, 포도농장의 총생산량과 재배 방식을 엄격히 통제한다. 품질등급을 표시하는 피라미드의 가장 위에 있다. 아펠라시옹은 산지명.
네고시앙(negociant): 포도농가에서 수확한 포도를 구입해 양조 숙성하거나, 양조된 포도액을 사들여 숙성해서 판매하는 와인 기업. 직접 샤토나 도멘을 구입해 포도 경작을 하기도 한다.
샤토와 도멘(chateau. domain): 샤토는 성이라는 뜻. 와인농장(와이너리)의 의미로 통용된다. 부르주아의 성이 많았던 보르도에는 샤토가 많고 부르고뉴와 론은 대부분 도멘으로 부른다.
“불고기-빈대떡 등 한국음식
달지않은 화이트와인과 맞아”
소믈리에 부디에 씨
아비뇽 인터론 사무실에서 만난 소믈리에 크리스토프 부디에 씨(사진). 그는 스페인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예술적인 콧수염을 바짝 세운 채 음식과 와인의 궁합(마리아주)에 대해 설명했다.
“한국 음식은 아방가르드 스타일입니다. 숙성된 맛은 유럽 음식과 달리 독특하지요. 전통적이고 독자적인 한국 음식은 맛의 연구가 깊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는 식초 친 한국 음식에 생 아망의 2006년 빈티지 ‘라 보리’를 추천했다.
“냉채류에는 비오니에 품종의 화이트 와인이 어떨까요. 간장이 들어간 음식에는 시그냐르그 2005년산이 맞을 겁니다.”
생선구이 모둠회 구절판 안심구이 삼겹살 갈비찜 불고기 빈대떡 등 한국 음식에는 달지 않은 드라이한 화이트와인이나 로제와인이 두루 어울린다. 레드와인의 경우 타닌 성분이 짙지 않은 가벼운 것이 좋다. 갈비찜이나 불고기에는 짜임새 있고, 보디감 있는 레드와인을 곁들여 볼 만하다.
이지훈 기자 jh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