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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길]경제개발의 길목에서

입력 | 2009-06-06 02:56:00

1990년 11월 30일 무역의 날 기념 리셉션에 참석한 남덕우 한국무역협회장(왼쪽에서 두 번째). 남 회장은 1991년 무역협회장을 사임한 후 무역협회 산하단체인 산학협동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산학협동재단 이사장으로

기금가치 하락에 사업규모 줄자

신축건물 임대로 장학사업 등 유지

기고-강연-저술 다양한 대외활동

나는 1991년 2월 한국무역협회장을 사임했으나 무역협회의 산하단체인 산학협동재단 이사장으로 가게 됐다. 산학협동재단은 1974년 3월 무역특계자금에서 26억 원의 기금을 출연해 설립한 재단으로, 그 후 무역협회의 출연이 증가했고 이사장은 언제나 무역협회 회장이 겸임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그런데 무역협회를 떠나게 되자 무역협회 회장단은 나에 대한 후정으로 나를 명예회장으로 추대하는 동시에 무역협회 회장 겸임의 전통을 깨고 나를 산학재단 이사장으로 가게 한 것이다.

산학협동재단은 산업과 학계의 협동을 목적으로 세워진 재단이지만 처음에는 학비를 댈 수 없는 고교생이나 대학생에게 학교의 추천을 받아 장학금을 지급했다.

또 다른 사업으로는 산업기술을 연구하는 교수들에게 연구비를 지원하고, 기업과 교수가 협동하여 기술개발을 추진할 때 기업이 일정액을 부담하면 재단이 동일 액수를 지원하는 매칭펀드제도를 시행해 산학협동을 도모했다. 연구 성과가 우수한 사례를 선정해 산학협동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설립 당시에는 상당히 큰 재단의 하나였으나 계속되는 인플레이션으로 기금 가치가 잠식되고 금리 하락으로 재산 수입이 감소했기 때문에 점차 사업 규모를 축소할 수밖에 없게 됐다. 결국에는 서울 서초구 서초동 강남대로에 있는 4층 재단 건물이 주된 재산으로 남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임용운 사무총장이 4층 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고층건물을 세우면 사무실 임대 수입으로 장학사업을 유지할 수 있겠다고 말했다. 나는 좋은 착상이라며 건설계획을 입안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재단이사회는 당연직인 구평회 무역협회 회장 외에 홍승희 전 재무부 장관, 최형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 남상수 남영비비안 회장, 안군준 미래와 사람 회장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1995년 2월 산학재단 건물신축 계획안을 상정하자 모두 찬성했고 200여억 원의 자금 조달 방안을 논의했다. 결국 재단이 보유한 상업은행 주식의 일부를 팔고 부족한 자금은 무역협회에서 일시 차입하기로 했다. 1996년 2월 양재동의 한 건물을 임차해 그곳으로 재단 사무실을 옮겼다. 1996년 4월에 착공해 1998년 9월에 지하 4층, 지상 20층 건물을 준공했다.

신축 건물의 임대 수입으로 재단 장학사업의 명맥은 유지할 수 있게 되었으나 그것만으로는 재단의 발전은 생각할 수 없었다. 재단의 공익사업을 조금이라도 늘려가자면 아무래도 무역협회의 직접적인 관심과 자금 투입이 필요한데 그렇게 하자면 산학재단의 이사직을 무역협회 회장 겸임으로 환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사회에서 나의 생각을 개진하고 무역협회 회장이 양해한다면 언제든지 사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당장은 뜻대로 되지 않았지만 2007년 2월 나의 임기 만료를 계기로 나의 뜻을 이룰 수 있었다.

나는 산학협동재단 이사장으로 있는 동안 재단 업무를 위해서는 별로 바쁜 일이 없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 신문, 잡지에 많은 기고를 했고 여러 곳에서 강연을 했다. 발표한 논문들을 모아 세 권의 책을 내기도 했다. 그리고 다양한 대외 활동을 계속했는데 이것은 모두 무역협회와 산학협동재단의 덕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