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9월 프랑스 파리모터쇼. 정의선 기아자동차 사장은 “기아차 브랜드를 표현할 수 있는 독자적인 디자인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며 “라인업의 디자인을 업그레이드하고 감각적 디자인 요소를 가미해 세계무대에서 경쟁력을 향상시키겠다”고 밝혔다. 세계 시장을 향해 ‘디자인 경영’을 선포한 것이다.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기아차는 이후 확실히 달라졌다. 굳이 ‘기아차가 달라졌다는 고객의 생각이 옳습니다’라는 최근 기아차 광고 카피를 떠올릴 필요도 없을 듯하다. 포르테, 로체이노베이션, 쏘울, 쏘렌토R… 도로 위를 달리는 기아차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쉽게 수긍할 것 같다.
○ “기아차가 달라졌어요”… 포르테-쏘울-로체 변신의 비밀
외환위기 직후 경영난에 처한 기아차를 구한 것은 ‘카니발, 카렌스, 카스타’ 등 레저용 차량(RV) 3총사였다. 이번 글로벌 경제 위기에서 기아차가 상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는 데는 지난해 출시한 포르테, 쏘울, 로체이노베이션 트로이카의 돌풍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은 정 사장이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디자인 경영’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더욱 크다. 대부분의 자동차 기업들이 올해 1분기(1∼3월) 판매량이 전년 동기 대비 절반 수준으로 감소한 상황에서 기아차는 17.4% 감소하는 데 그쳤다. 내수(內需) 시장 판매에서는 오히려 같은 기간 6.7% 증가했다. ‘디자인 트로이카’ 덕분이었다. 기아차 관계자는 “기아차가 RV 명가(名家)라는 과거에 매달려 있었다면 이번 위기에서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라며 “혁신적이고 세련된 디자인의 신차를 잇달아 내놓은 게 주효했다”고 말했다.
2006년 디자인 경영을 선언한 정 사장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세계 3대 자동차 디자이너 중 한 명인 피터 슈라이어 씨의 영입이었다. 슈라이어 씨는 아우디와 폴크스바겐 등 세계적인 자동차 기업에서 활약했다. 기아차 디자인 총괄담당 부사장으로 영입된 그는 국내뿐 아니라 유럽, 미국, 일본 등의 기아차 해외 디자인 거점을 모두 관장하면서 기아차만의 차별화된 디자인 개발에 주력했다. 이듬해 4월 기아차는 ‘직선의 단순화’라는 기아차 디자인의 방향을 제시했다.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선(線)을 만들어 내겠다’는 이 명제는 이후 출시된 신차들에서 기아차만의 독특한 정체성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 로체이노베이션에서 시작된 호랑이 얼굴을 상징하는 라디에이터 그릴은 포르테, 쏘울에 이어 쏘렌토R 등으로 이어지는 강한 패밀리룩을 형성하고 있다. 정 사장은 “호랑이 모양의 라디에이터 그릴은 처음으로 구체화된 기아차만의 디자인 요소”라며 “헤드램프, 로고 등과의 조합을 통해 기아차의 패밀리룩을 완성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 디자인 경영의 생활화, 그리고 이어지는 국내외 호평
지난해 4월 기아차는 디자인 슬로건을 각종 사무용품과 문서 서식 등에 사용하며 디자인 경영의 생활화에 나섰다. 슬로건은 ‘DESIGN’ 알파벳 중 ‘S’를 호기심을 나타내는 ‘?(물음표)’로, ‘I’를 창의적 아이디어를 나타내는 ‘백열전구’로 표현했다. 이는 고객의 요구에 끊임없는 질문을 던져 좀 더 나은 가치를 창출하자는 정 사장의 경영 철학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디자인에 쏟는 정 사장의 열정은 지난해 6월 미국 디자인센터 완공으로 한국-유럽- 북미를 잇는 글로벌 디자인 네트워크 완성으로 나타났다. 이들 디자인센터는 다양한 공동연구 활동을 통해 기아차 디자인의 정체성과 글로벌 디자인 트렌드를 반영한 새로운 자동차 디자인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국내외 디자인센터에서는 100여 명의 디자이너가 참여해 다양한 협업으로 새로운 디자인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경기 화성시 남양디자인센터는 글로벌 디자인 개발을 종합적으로 수행하고, 서울 서초구 양재동 본사 사옥에는 미래 디자인 트렌드 연구를 위한 선행디자인연구 부문이 별도로 있다. 이 같은 정 사장의 디자인경영은 지난해 대한민국 디자인 대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올해 들어서도 ‘쏘울’이 세계 3대 디자인상 중 하나인 ‘레드닷 어워드’를 받았다. 지난해 초부터 잇달아 선보인 쏘울, 포르테, 로체이노베이션, 쏘렌토R에 대해 국내외 소비자와 언론 매체의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조용우 기자 woogij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