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학 당장 영어로 강의하라”는 홍콩대 총장의 충고가 나의 눈길을 끌었다. 지금의 상황에서 당장 영어로 강의하라는 말은 설득력이 없다. 나는 한국 대학에서 영어로 가르치는 강좌를 늘리는 일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한국 대학에서 영어로 가르치는 강좌 수나, 외국인 학생 수를 따져서 대학을 평가하는 방안에도 반대한다. 내가 국수주의자라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나는 영어로 한평생 강의를 해 왔다. 또 지금도 영어로 강의를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영어 강의를 늘리는 일은 타당치 않다고 생각해 왔다.
대학의 수준을 올리려면 교수의 지적 수준과 연구 수준을 올려야 한다. 연구에 몰두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연구에 매진할 조건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 학자에게 필요한 지원도 하고 실력에 걸맞은 대우도 해서 교수가 신바람 나게 연구해야 한다. 그리고 우수한 제자를 많이 키워내야 한다. 자연과학 분야는 모르겠으나 사회과학이나 인문과학 분야에서 한국 대학의 환경은 매우 열악하다. 나는 내 전공인 한국정치사를 연구하면서 영어 일본어 중국어로 발간한 책자와 자료를 찾는데 한국 어느 도서관에서도 찾지 못하는 책이 너무나 많다.
학문 수준과 국제화 사이에는 어떠한 연관성이 있을까? 영어로 가르치는 강좌 수가 많을수록 국제화가 촉진되고 대학 수준이 올라간다고 하는데 과연 그 말이 맞을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홍콩을 포함한 영어권 국가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대학이 존재한다. 이들은 모두 영어로 가르치기도 하고 배우기도 한다. 이들 중에서 세계적인 명문대라고 할 수 있는 대학은 그리 많지 않다. 가르치는 언어와 학문 수준 간에는 연관성이 없다. 내용이, 콘텐츠가 문제이다.
나는 외국 대학과 참다운 교류를 증진하면서 강점을 살리고 약점을 보충하는 일이 지금의 국제화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반짝 각광을 받기 위한 조치보다 세계 각국의 대학과 진정한 의미의 교류관계를 맺어야 국제화가 이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학자 간 교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국내 대학의 질을 향상시켜야 한다. 대학의 질, 즉 기초학문을 포함한 학문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 국가 차원의 투자를 계속해야 한다. 200년, 300년 앞선 대학과 겨루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대학의 질적 향상과 국제화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바라봐야 한다.
내가 영어로 가르치는 강좌 수 증가를 반대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오랫동안 국내 대학에서 영어로 가르쳐 본 경험에서 나온다. 지금 상태에서 대학생에게 영어로 강의를 하려면 가르치는 질을 대폭 떨어뜨려야 한다. 과제물의 양도 대폭 줄이지 않을 수 없다. 학생의 영어 독해력이 빈약하기 때문이다. 과제물의 양을 줄였다고 해도 주어진 과제물을 100% 이해했다고 볼 수 없다. 또 그들이 영어로 논문을 써야 하는데 도서관 자료가 빈약하고 작문 실력이 너무나 허약하다. 영국이나 미국의 사립 고등학교에서는 몇 해 동안 매주 논문 쓰는 훈련을 시키는데 콩글리시밖에 쓰지 못하는 한국 대학생이 하루아침에 이를 따라잡을 수는 없다. 영어로 가르치는 강좌는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닌 결과를 자아내게 마련이다.
대한민국의 대학에서 영어로 가르치는 강좌를 늘려야 한다면 대학에 영어로 가르치는 대학 또는 학부를 만들어 따로 가르쳐야 한다. 외국인고등학교와 같이 해야 한다. 그 외의 학생에게는 수준 높은 강의를 한국말로 해야 한다. 한국말로 착실하게 공부하고 와서 미국 학생 못지않은 성적을 올리면서 성과를 거두는 유학생을 너무나 많이 봤다.
이정식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