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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멀쩡한 옛 한옥 부수고 새 한옥 짓나요”

입력 | 2009-06-09 21:51:00


최근 서울행정법원이 한옥이 밀집한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 일대의 재개발 사업 추진 절차에 하자가 있다며 서울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미국인 피터 바돌로뮤 씨(61) 등 주민 20명의 손을 들어줬다.

1년 7개월여 만의 승소. 바돌로뮤 씨는 최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그간의 우여곡절이 떠올랐는지 잠시 침묵하다 "속시원하다"고 말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번 판결로 한옥 보존에 대한 공감대가 생긴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공감대가 실제 정책에 반영되느냐가 더 중요해요. 지난해 말 서울시가 한옥 밀집 지역 중 재개발이 예정된 곳은 한옥 보존을 전제로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했지만 그 전에 이미 서울의 상당수 한옥 밀집 지역에 재개발 사업 허가가 난 것에는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아요."

재판이 진행 중이던 6개월 전 동소문동 집에서 만났을 때(본보 2008년 12월 17일자 A12면 참조)처럼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시 그는 상기된 얼굴로 "한옥처럼 오래된 집을 오래된 냉장고나 텔레비전 버리듯 취급하는 곳은 한국 밖에 없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바돌로뮤 씨는 법원이 한옥의 보존 가치 그 자체에 주목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고 말했다. 법원은 동소문동 재개발 구역의 노후 불량률이 법령이 정한 기준(60%)에 미치지 못한 점을 인정했지만 한옥이 보존 필요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노후하거나 불량한 건축물에 해당하지 않는다고는 볼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그래도 희망을 얻었다. 이번 소송 전에는 한옥이면 무조건 낡은 것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런 생각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고 했다.

바돌로뮤 씨는 "동소문동이 '한옥은 허물어야 할 대상'이라는 생각을 바꾸는 본보기가 됐으면 좋겠다"며 "동소문동의 경우 과연 한옥이 실제로 노후한 건물인지 과학적인 조사를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재판을 시작한 이후 바돌로뮤 씨가 가장 가슴 아프게 한 것은 그의 한옥 사랑을 "돈 많은 외국인이 유유자적하는 것"으로 치부하고 그 때문에 한옥을 수리할 돈 없는 가난한 주민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오해. 재판에 이긴 뒤 기자들이 그의 집에 몰려들었던 5일에도 집 밖에서는 재개발을 추진하는 이들이 시위를 벌이고 욕설을 했다.

"서울 마포구 아현동의 재개발 예정지에 한옥을 임차한 젊은 캐나다 친구도 부자가 아닙니다. 그곳에서 살기 위해 망치질에 손가락을 다쳐가며 직접 한옥을 보수합니다. 미국과 유럽인들은 오래된 건물을 고쳐 쓰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국인들이 오래된 한옥은 무조건 지저분하다, 고칠 수 없다고 단정하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유럽 선진국의 경우 작은 고택 하나도 함부로 헐지 않기 때문에 오래된 집의 난방과 배관 주방 목욕탕을 보수하는 수리업이 발달돼 있다는 것이다.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 건설업계가 신축 공사 수요의 부족을 걱정할 게 아니라 한옥 보수 사업을 발전시키면 한옥 보존이 개발의 걸림돌이 된다는 인식도 줄어들 것이라는 게 그의 말이다.

"외국인들이 한옥을 보고 '왜 이렇게 좋은 것을 없애려고 하냐'고 말하는 건 단지 이국적인 문화에 대한 동경이 아니라 오래된 집을 고쳐 사는 문화 때문이에요."

바돌로뮤 씨는 한옥을 보존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로 광복 이후 한국의 급격한 산업화로 인한 문제를 지적했다. 짧은 시간에 첨단 도시가 형성되면서 전통 건축의 맥이 단절되고 있다는 것이다. 20세기 초에 지은 100년 밖에 안 된 한옥이라도 지금은 잇기 어려운 조선시대의 귀한 건축 전통이 남아 있을 수 있으며 그것을 없애는 일은 과거의 찬란한 문화유산과 단절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말했다.

"한옥이 잘 남아 있다는 서울 종로구 북촌을 가보니 멀쩡한 옛 한옥을 부수고 원형과 상관없는 새 한옥을 짓고 있더군요. 새 집에 사는 것만이 행복한 건 아니지 않나요?"

윤완준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