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히 자금 지원을 요청했지만 IMF는 충분한 재원을 확보하지 못해 즉각적으로 한국에 외화를 투입할 수 없었다. 2000년 호르스트 쾰러 IMF 총재(왼쪽)와 악수하는 김대중 대통령. 동아일보 자료 사진
IMF 자체의 문제점
심리적 불안은 유동성 늘리면 해소
재원 없는 IMF 즉각 대응에 한계
98년 美세미나서 조목조목 비판
외환위기가 발생한 지 1년이 지난 1998년 10월에 나는 또다시 미국 워싱턴으로 건너가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IBRD) 연차총회가 마련한 세미나에서 매사추세츠공대(MIT)의 폴 크루그먼 교수, 인도네시아 국제전략연구소 마리 판게스투 소장과 함께 아시아의 외환위기에 관해 토론했다. 이와 함께 ‘한국의 개혁정책을 평가한다’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IMF의 기능과 외환위기 관리방식을 구체적으로 비판했다.
여기에서도 나는 한국 사태의 핵심은 유동성 부족이고 경제의 기초체력에는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을 태국, 인도네시아와 비교하여 숫자를 들어 설명했다. 물론 외환위기는 한국경제의 구조적 취약점과 무관하지 않지만 그 사실은 국제사회에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국내에서도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었으니 외환위기 이전에 이미 13개의 개혁법안이 국회에 계류 중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IMF 자체의 약점을 지적했다.
태국에서 발생한 외환위기를 계기로 외국투자가들이 한국의 구조적 취약점에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선진국 경제사가 말해주듯이 금융위기에는 언제나 심리적 요인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심리적 불안 때문에 외국투자가들이 일시에 돈을 빼가려 할 때 그것을 일시적으로 진정시키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즉, 충분한 유동성을 준비해 언제라도 고객들이 원하면 돈을 내줄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외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은 긴급히 IMF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러한 구원 요청은 IMF 회원국의 당연한 권리이고 바로 그 목적을 위해 IMF가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 그 당시 IMF가 즉각적으로 300억 달러 정도만 한국에 투입할 수 있었다면 한국은 외환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IMF는 이러한 즉각적인 대응에 실패했다. 그 이유는 IMF의 설립 목적과 기능에 상응하는 재원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IMF 당국은 이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증자계획을 편성하고 선진국 회원들에게 협조를 요청했으나 미국 의회의 반대로 180억 달러의 증자 쿼터를 이행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IMF는 가용자금 이외에 각국 정부와 교섭하여 이곳저곳에서 출연금을 긁어모아 580억 달러의 융자한도를 설정해 주었으나 교섭에 시간이 걸렸다. 또 IMF의 부대조건에 합의해야 그 자금을 인출할 수 있기 때문에 한국 정부로서는 즉각적인 대응이 불가능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IMF는 그 헌장의 정신에 따라 세계 중앙은행의 역할, 즉 ‘자금융통의 최후수단’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재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회원국에 외환위기가 발생하면 즉각적으로 긴급자금을 투입해 우선 급한 불을 끄고 나서 해당 정부에 구조조정에 필요한 조치를 요구하고,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 벌칙을 적용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고칠 필요가 있다.
나는 이렇게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과 함께 IMF의 거시정책을 비판한 나의 논문은 한동안 세계은행 홈페이지 바탕화면에 올라 있었다. 나는 이 논문을 통해 미국 금융사회가 한국 외환위기의 성격과 IMF 주도의 대응 방안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자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