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글게 표현한 보티첼리의 ‘봄’
식탁에 앉아 신문을 든다. 눈이 가는 기사를 훑으며 한 손으로는 수저를 든다. 기사 아래에는 광고가 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만약 방금 본 광고가 뭐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잘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필자의 아침 모습이지만 다른 분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하다. 광고학에서는 이런 과정이 적어도 서너 차례 반복돼야 사람들이 광고를 기억하고 내용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광고로 넘쳐나는 세상에서 소비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광고대행사가 접촉률, 주목률 등 여러 지표를 측정해 디자인에 반영하기도 하지만 모두 대증요법일 뿐이다. 오히려 가장 의지하는 것은 디자이너의 경험이다.
이런 와중에 요즘 새로운 방법이 최근 주목받고 있다. 카를 구스타프 융의 원형(元型) 개념이다. 융은 마음을 3개 층으로 둘러싸인 알과 같은 형태로 보고 맨 바깥은 의식, 그 안쪽이 개인의 무의식, 가장 깊은 곳이 집단무의식이라고 했다. 그 집단 무의식의 핵이 바로 원형이다. 집단무의식은 한 집단이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공유하는 어떤 이미지 같은 것을 말한다. 그것의 핵인 원형은 한 문화가 공유하고 있는 더 응집된 이미지가 된다. 대표적인 원형으로는 △원형(圓型) △아동 △늙은 현인 △영웅 △그림자 △태모(太母) △모녀(母女) △남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아니마’라는 여성성 △여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아니무스’라는 남성성 등이 있다.
이런 원형들은 각 문화의 신화 속에 상징으로 등장하는데 강한 정서적 효과를 갖고 있어 시선 유도 효과가 탁월하다고 한다. 미국 마케팅학회에서는 원형이 가진 강한 정서적 효과와 주목성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몇 년 전 국내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된 클로테르 라파이유의 ‘문화적 코드’도 바로 원형을 디자인이나 광고에 사용한 사례에 관한 책이다.
일본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있다. 정밀측정기 제조업체인 안리쓰는 1996년부터 원형에 관한 많은 데이터를 축적해 광고에 활용해 왔다. 예컨대 그림에서 보는 것은 ‘지(知)의 제조업(製造業)’이란 주제로 니혼게이자이신문에 게재된 11개의 시리즈 광고 중 첫 번째 것이다. 르네상스 화가 보티첼리의 ‘봄’을 소재로 원형(圓型)을 이용했다. 그 주목도 조사 결과가 매우 흥미롭다.
단 한 번의 광고로 “확실히 봤다”와 “본 것 같다”고 답한 사람이 응답자의 70%였다. 2004년 1월 1일 전 7단으로 게재됐는데 같은 크기로 비슷한 시기에 게재된 소니나 후지쓰 등 더 크고 유명한 7개사의 광고 주목도를 압도했다. 안리쓰는 11개의 시리즈 가운데 9개 광고에서 동일한 원형을 사용했다. 원형을 사용하지 않은 광고에서는 모나리자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자화상을 사용했다. 모나리자는 어머니보다 더 큰 존재인 태모, 또는 모녀간에만 공유할 수 있는 체험과 관련된 모녀 원형을 이용해 여성 고객에게 호소하기 위한 것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초상은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백색 마법사 간달프 같은 ‘늙은 현인’이라는 원형이다. 거의 모든 광고가 예상을 뛰어넘는 주목 효과를 거두었다.
더 신기한 것은 이 광고를 “확실히 봤다”고 답한 사람이 응답자의 24.6%였던 데 비해 “광고 내용을 안다”고 말한 사람은 34.1%였다는 점이다. 광고에 주목하지 않고도 처음 보는 광고의 내용을 이해한다고 답한 사람이 있다는 신기한 사실은 당시 많은 사람의 흥미를 불러일으켰고 다각도로 검증됐지만 결과는 불변이었다. 안리쓰만큼 강하지는 않지만 비슷한 사례는 지금도 확인되고 있다.
원형이 가진 이런 힘은 ‘주목 없이는 정보전달도 없다’는 광고의 ‘AIDMA(Attention>Interest>Desire>Memory>Action)’ 법칙을 뒤엎는 것이다. 이는 마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들리는 모국어처럼 원형이라는 것이 우리의 기억 깊숙한 곳에 이미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데, 아쉽게도 이 이상 밝혀진 바는 아직 없다. 뇌과학자 일부가 자발적 운동을 할 때 관계하는 대뇌기저핵(Basal Ganglia)이 원형의 주목 효과 등과 관련됐을 수 있다는 추정을 내놓을 뿐이다.
그러나 원형의 정보전달 효과는 계속 확인되고 있다. 디자이너로서는 또 다른 창작의 원천을 찾은 셈이기도 하지만 문화의 원류를 좀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부담도 안게 됐다.
지상현 한성대 교수·미디어디자인콘텐츠학부 psyjee@hansu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