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 매운맛 세계와 통했다
한국능률협회컨설팅(KMAC) 브랜드파워지수(K-BPI·Korea Brand Power Index) 9년 연속 1위, 한국생산성본부 고객만족도 1위, 산업정책연구원 슈퍼브랜드 3년 연속 1위. 1조7000억 원 규모 국내 라면 시장에서 지난해 기준 23.9%의 점유율. 한 회사의 성적표가 아니라 권장소비자가 750원 정도인 한 ‘제품’의 성적표다. 바로 1986년 세상에 처음 나온 농심의 간판 제품 ‘신라면’이다.
○1년 내내 ‘매운맛’ 보며 제품 개발
1985년 ‘안성탕면’이 히트를 치며 라면업계 1위 자리에 오른 농심은 이 자리를 확실히 굳히는 것을 다음 목표로 세웠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가장 필요했던 것이 ‘프리미엄’ 이미지를 가진 새로운 라면이라고 판단한 농심은 다양한 연령대 소비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며 제품 개발에 들어갔다.
설문조사 결과는 다소 뻔했다. 한국인들이 매운맛을 가장 선호한다는 결론이 난 것. 하지만 ‘매운맛 라면’을 만드는 일은 말만큼 쉽지 않았다. 핵심인 양념수프를 만드는 일부터 난관이었다. 국물로 우려냈을 때 매우면서도 기름에 튀긴 면발의 느끼함을 씻어줄 수 있는 시원한 맛을 내는 고추를 찾아야 했다. 개발팀은 전국에서 재배되는 모든 고추 품종을 사들여 국물을 우려냈고, 연구원들이 하루에도 20번 넘게 이 ‘매운 국물’을 연방 마셔가며 가장 알맞은 고추 품종을 고르기 시작했다. 위장을 혹사해 가며 고추 품종을 찾았건만 문제는 또 있었다. 같은 품종이라도 재배 지역이 다르면 고추의 매운맛이 달랐던 것. 이래서는 가공식품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정한 맛’을 낼 수 없었다. 결국 1년이 넘게 고추에 매달린 개발팀은 산지에서 직접 사들인 생고추를 일정한 맛을 내도록 가공할 수 있는 특허 기술까지 발명해 표준화에 성공했다.
면발도 200종류가 넘게 만들어 테스트를 했다. 면 두께와 모양 등을 다르게 해 뽑아낸 면을 계속 시식해 가며 이상적인 면 형태를 연구해야 했기 때문. 신라면 개발에 참여한 심선택 농심 연구개발실장은 “하루에 평균 세 봉지 정도의 라면을 매일 먹었다”며 “초시계로 시간을 재고 비커와 온도계로 물의 양과 온도를 정확히 측정해 가면서 맛을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라면을 좋아하는 연구원들도 ‘즐기며’ 먹기는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연구 결과 쫄깃하면서도 라면 국물과 양념이 면에 잘 배도록 하기 위해서는 단면이 둥근 형태의 면이 최적이라는 결론이 났다. 농심은 즉시 원형으로 면을 뽑아 가공할 수 있는 기술을 도입했다.
○상식을 깬 프리미엄 마케팅
당시에는 파격적이었던 마케팅도 제품 시판 초기 소비자들에게 ‘신라면’의 존재를 알리는 데 한몫했다. 당시에는 ‘쇠고기라면’, ‘김치라면’처럼 주 재료를 이름에 사용하거나 회사명을 그대로 제품명으로 쓰는 라면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매운 라면’이라는 제품 콘셉트를 재료나 회사 이름으로는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고 판단한 농심은 오랜 관행을 깨고 한 음절 이름을 붙였다.
신라면 포장에 그려진 ‘辛’자가 관련법을 바꿔가면서까지 들어가게 된 것이라는 일화도 식품업계에서는 유명하다. 당시 식품위생법에는 “포장에 쓰는 제품명은 반드시 한글로 표기해야 하며 한자나 외래어를 쓸 경우는 한글보다 작은 크기로 써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하지만 이미 정한 이름을 바꿀 수 없었던 농심은 관련 당국에 법 개정을 지속적으로 건의해 결국 식품위생법을 개정한 뒤에야 ‘辛’자를 커다란 붓글씨로 그려 넣을 수 있었다.
우여곡절을 거친 신라면의 판매 초기 가격은 200원. 당시 라면이 대부분 100∼120원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갑절 가까이 되는 값이다. ‘위험한 시도’라는 평가도 있었지만 시판 한 달 만에 슈퍼마켓이나 백화점 등 전국 유통망 중 약 87%에 신라면이 납품되며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했다.
손욱 회장 “年500억개 라면 소비 中시장 집중 공략”
여러 유행어를 만든 광고도 발매 초기 제품을 널리 알리는 데 한몫했다. 시판 직후부터 1992년까지 사용한 ‘사나이 울리는 신라면’이라는 광고 카피는 제품 특성을 함축적으로 전달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1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하는 소비자들이 있을 정도다.
○한국의 매운맛을 세계로
1년 동안 팔리는 신라면을 일렬로 늘어놓은 길이는 에베레스트산(해발 8848m) 1만8083개를 쌓은 높이와 같고 면을 한 가닥으로 이으면 지구를 998바퀴 감을 수 있는 길이가 나온다. 판매가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팔린 개수는 국내에서만 총 170억 봉지. 하루 평균 약 200만 개다.
해외에서도 이색 먹을거리로 인식된 신라면은 미국 뉴욕 케네디 공항, 중국 베이징 서우두(首都) 공항 등 세계 주요 도시의 관문에 입점한 식당에서도 맛볼 수 있을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 일본 세븐일레븐, 미국 월마트 등 현지 유명 유통업체에 납품되고 있다. 남태평양 사모아,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 등 약 70개국 주요 식품 매장에서도 신라면을 구입할 수 있다.
특히 농심이 주목하고 있는 시장은 중국. 1990년대부터 라면 소비가 급격하게 늘기 시작해 지금은 1년에 500억 개의 라면을 소비하는 ‘블랙홀’ 같은 시장이다. 손욱 농심 회장도 “중국을 기점으로 아시아와 유럽 시장에 적극적으로 진출해야 한다”고 수시로 강조한다. 이에 따라 농심은 1996년 농심의 첫 해외 공장을 중국 상하이(上海)에 세운 후 1998년에 상하이 제2공장, 2000년 선양(瀋陽) 공장을 잇달아 세우고 지난해 9월 상하이 제1공장을 증축하는 등 지속적으로 생산 시설을 확충하고 있다. 중국 외에도 미주, 특히 중남미 국가에서 신라면이 인기를 끌면서 2005년 6월부터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도 신라면을 생산하고 있다.
이원주 기자 takeoff@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