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대 석좌교수로 5년간 강의하는 ‘거대사’ 연구의 창시자 데이비드 크리스천 호주 매콰리대 교수. 전영한 기자
■ 이대서 5년간 강의하는 ‘거대사’ 창시자 데이비드 크리스천 교수
핵무기 개발 등으로 24시간이면 인류공멸
빌 게이츠 제안으로 전세계 고교생 위한 거대사 프로그램 계획
‘거대사(Big History)’는 1980년대 세계 역사학계에 등장한 개념이다. 137억 년 전 빅뱅(Big Bang)에서 45억 년 전 태양의 형성, 25만 년 전 호모사피엔스의 등장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를 우주 생성까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거대사는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거치며 역사학의 한 흐름을 형성했다. 거대사의 창시자로 꼽히는 데이비드 크리스천 호주 매콰리대 교수(63)가 12일 한국에 왔다. 크리스천 교수는 교육과학기술부가 시행 중인 세계 수준의 연구중심대학(WCU) 프로그램에 따라 5년 동안 이화여대 석좌교수로 강의한다. 14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지구사연구소(소장 조지형)에서 그를 만났다.
-거대사의 개념은 무엇인가.
“우주 바깥에서 지구를 바라보듯이 큰 범주에서 인류의 역사를 통찰하는 역사학의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 역사를 통찰한다는 점에서는 ‘지구사(Global History)’와 공통점이 있지만 선사시대 이전의 우주와 지구 생성도 연구 범주에 포함시키기 때문에 지질학과 천문학, 생물학 등 자연과학의 영역을 아우르는 특성이 있다.”
그는 거대사와 지구사를 구별했지만 학계에서는 큰 틀에서 거대사와 지구사를 유사한 개념으로 본다. 지구상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개념으로서의 보편사, 기존의 세계사와 역사들을 통합하는 개념으로서의 통합사, 국민국가를 넘어서는 역사를 보자는 개념의 트랜스내셔널 역사(transnational histories), 큰 역사 현상을 살펴야 한다는 의미의 거시사 등은 지구사(거대사)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는 거대사와 관련해 우주 생성이 인류 역사에 미친 영향을 공룡 멸종의 사례를 들어 설명했다.
“소행성 충돌로 인한 파편이 지구에 떨어져 엄청난 기후변화를 초래한 것이 공룡의 멸종을 가져왔다는 최근 과학계의 연구 결과가 있었다. (1억6000만 년 전) 소행성 파편이 지구에 떨어지지 않았다면 공룡은 멸종하지 않았을 것이고, 포유류는 번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인류의 역사도 없었을 것이다.”
-왜 이 시점에 거대사가 중요한가.
“이제 한 민족이나 국가에 충성해야 한다는 역사로는 충분치 않은 시대다. 핵무기의 개발 등으로 이제는 24시간 이내에 인류가 멸망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운명을 공유하는 인류 공통의 역사가 있다는 데에 동의하는 게 중요해졌다. 종족과 민족, 국가의 정체성을 공격하자는 게 아니라 그런 정체성을 포괄하는 우주적인 정체성까지 인식하자는 의미다. 여기에 더해 중세와 근대에는 거대사적 연구 전통이 있었음에도 불가능했던 연구가 현대에 와서는 과학기술의 뒷받침으로 가능해진 점도 꼽을 수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발전한 거대사 연구는 2000년대 들어 눈에 띄는 성과를 냈다. 지역사 중심 혹은 서구 중심주의적인 시각이 두드러졌던 기존의 세계사와 달리 거대사 시각을 반영한 세계사 과목은 2002년 미국 고교생이 대학입시에서 선택하는 ‘상급 프로그램(AP·Advanced Program)’에 추가됐다. 세계사를 선택해 시험을 치른 학생은 첫해 2만여 명에서 지난해 12만여 명으로 6배가량으로 늘었다. 그는 올해부터는 호주 정부의 지원을 받아 호주 고교생을 위한 ‘거대사 속의 호주사’ 강의를 준비하고 있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의 제안에 따라 내년 초 전 세계 고교생을 위한 거대사 프로그램 개발에 들어간다.
-게이츠 씨와의 인연이 궁금하다.
“2008년 10월경 미국 샌디에이고주립대에 재직하고 있을 때였는데 게이츠 씨가 직접 전화를 걸어 왔다. 헬스클럽에서 트레드밀을 달리며 DVD로 내 거대사 강의를 들었다고 했다. 그동안 자신이 공부했던 지식을 통합적인 시각으로 보는 틀을 얻었다면서 나에게 만나자고 했다.”
게이츠 씨는 그를 만나 전 세계 고교생을 위한 거대사 프로그램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 10월 한 차례 협의를 거쳐 내년 2월부터 본격적인 프로그램 제작에 들어간다. 여기에 이화여대 지구사연구소도 참여한다.
그는 16일 오후 5시 이화여대 국제교육관에서 ‘왜 지금 지구사인가’를 주제로 한국에서의 강의를 시작한다.
“한국에 오기 전 한국은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다고 들었는데 역사학 쪽에서 보면 그렇지 않은 나라가 드물다. 게다가 내가 말하는 거대사는 국사를 배척하자는 게 아니라 ‘거대사 속의 한국사’처럼 큰 맥락에서 자국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갖자는 것이다.”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