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억 뜯긴 건설사 사장, 속은 것도 몰라
수도권에서 작은 건설회사를 경영하는 A 씨(50)는 2007년 초 모 대학 최고경영자 과정에서 알게 된 지인의 소개로 대형 한약재상을 운영한다는 김모 씨(48)를 만났다. A 씨는 시원시원한 성격에 ‘싱글’ 수준의 골프실력을 갖춘 김 씨와 여러 차례 골프장에 함께 다니며 친분을 쌓았다. 그해 6월 A 씨는 김 씨와 골프를 치던 중 “잠깐 전화 좀 빌려 쓸 수 있느냐”며 접근해 온 여성 유모 씨(36)와 알게 됐다. 유 씨는 골프장 근처의 한 식당에서 우연을 가장해 두 사람과 합석했고, 김 씨는 A 씨에게 “유 씨 친구들을 초대해 중국으로 함께 골프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다.
한 달 후 이들 3명을 포함한 남녀 6명은 중국 샤먼(厦門)으로 여행을 떠났다. 처음 이틀간 골프만 치느라 지루했던 A 씨에게 김 씨는 “여기까지 왔는데 도박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 김 씨가 데려간 곳은 호텔 객실 안에 차려진 불법도박장. 판돈이 크지 않아 안심했던 A 씨는 김 씨와 유 씨가 권하는 술잔을 들이켜다가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9억5000만 원의 도박 빚을 진 상태였다. 여권을 빼앗긴 A 씨는 자기 회사 직원에게 도박장 운영자가 알려준 환치기 계좌로 2억 원을 송금하라고 연락했고, 김 씨를 도박장에 볼모로 남겨둔 채 다음 날 급히 귀국해 7억5000만 원을 더 보냈다.
A 씨는 관세청 서울본부세관이 최근 유인책 5명, 미인책 2명, 총책과 자금세탁책 각 1명 등 9명으로 구성된 해외원정 사기도박조직을 적발하고 자신을 소환하자 그제서야 6개월간 치밀한 ‘작업’을 당한 피해자였음을 알게 됐다. 김 씨가 사기조직의 일당이라는 것도 이때 알았다.
서울본부세관은 검거한 조직원 7명과 피해자들을 외국환거래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송치할 방침이라고 14일 밝혔다.
최창봉 기자 cer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