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경영(經營)입니다.”
선문답(禪問答) 같은 대화. 하지만 삼성전자가 ‘경영’이라고 정의를 내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삼성전자는 1993년 디자인 전공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교육기관인 ‘삼성디자인멤버십’을 시작으로 디자인 전문교육기관 ‘SADI(삼성 아트 앤드 디자인 인스티튜트)’를 통해 디자인 교육에 대한 열의를 보였다. 하지만 본격적인 변화는 2000년대 들어서였다. 2001년 디자인경영센터를 조직 내 편성한 삼성전자는 ‘선(先) 디자인-후(後) 개발’ 전략을 세웠다. 디자인이 단순한 제품 외관을 차별화하는 ‘보조’ 역할이 아닌 기업 경영의 중심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애니콜 ‘가로 본능’부터 하우젠 에어컨, 발광다이오드(LED) TV까지…. 그간 강조해온 디자인 경영을 통해 이들은 ‘디자인 명품’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불완전한 느낌이다. 디자인 경영이라는 말에서 차가움, 난해함이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기에. 이에 삼성전자는 ‘감성’이란 히든카드를 꺼내 들었다. ‘감성 여행을 창조하라(Create an Emotional Journey)’라는 디자인 철학을 만든 것. 날카롭고 무정한 기계 덩어리에 ‘36.5도’의 체온을 불어넣고 싶다는 의지. 경영에서 출발해 감성 여행으로 이어지는 이들의 ‘디자인 여정’은 어떤 모습일까? 이들의 감성 여행길을 조용히 따라가 봤다.
○ 삼성전자 #1…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순하라
“이것은 ‘키위’와도 같다!”
▶ 감성 36.5℃
▶ 자연주의로 말한 ‘마켓오’
▶ 주인님의 개성 돋보이게
▶ ‘보는 오디오’ 거실 밝히다
▶ 부산, 공공예술로 날다
▶ 부산의 얼굴이 된 건축
▶ 아파트냐 아트냐
▶ 고정관념 벗었다
그의 ‘손 맛’이 담긴 이 노트북의 첫인상은 사실 심심할 정도로 단순하다. 모서리, 위 뚜껑 등 전체적으로 둥근 외향은 매끈하게 잘 빠진 최근 전자기기들과 달리 느슨해 보일 정도다. 하지만 후쿠사와 씨 얘기는 달랐다.
“날카롭고 각 진 모습, 광택감이 넘치고 세련미가 흐르는 디자인은 인간을 본능적으로 긴장하게 만듭니다. 그 긴장감을 해소하는 것이 이 노트북의 디자인 목표였죠.”
그의 디자인은 “왜 단순해지지 않으려 하는가”에서부터 출발했다. 스타일에 너무 신경쓰다 보면 친근함에 대한 가치를 간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긴장감을 없애는 것이 가장 뛰어난 디자인”이라는 그는 낯설지 않은 모습에 자극적이지 않은 색을 입혀 편안함을 주는 방향으로 노트북 디자인 주제를 잡았다. 지갑이나 핸드백 같은 일상적인 패션 소품에서 영감을 얻은 그는 네모반듯한 ‘각’을 없앴고, 최대한 부드럽고 매끈하게 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단순함과 간결함, 그리고 친근감은 최근 삼성전자 디자인의 최대 화두로 꼽힌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반드시 뒤따라야 하는 부분은 바로 감성이다. 디자인은 이제 외관 그 이상의 역할, 즉 ‘소통’을 하려 한다.
이러한 경향은 하우젠 에어컨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올해 초 피겨스케이팅 김연아 선수를 모델로 세운 삼성전자는 그를 형상화한 한정판 에어컨 ‘하우젠 바람의 여신’을 내놨다. 디자인의 핵심은 S라인. 김 선수의 유연함을 상징하는 ‘S라인’ 곡선이 에어컨 전반부에 크게 새겨져 있으며 LED 조명을 사용해 우아함을 부각시켰다. 색도 3, 4가지가 전부다. 화려하거나 날카로운 느낌은 없다. 그럼에도 이 제품의 인기는 날로 높아져 5월 하우젠 에어컨 판매량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5% 성장했다.
단순 간결하고 친근하게
단순함이 애초부터 강조된 것은 아니었다. 하우젠 에어컨 디자인은 2003년 하우젠 브랜드 탄생 이후 약 2년에 한 번씩 디자인 콘셉트가 바뀌었다. 2004년에는 와인과 페이즐리 무늬를 넣고 빨강 노랑 등 원색을 과감하게 강조한 에어컨을 공개했고 2006년에는 디자이너 앙드레 김과의 협업을 통해 화려한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그리고 지난해부터는 외관 테두리를 없앤 ‘트림리스(Trimless)’ 디자인, 가전제품 속에 담긴 실용성 극대화 등 지금의 미니멀리즘이 나타났다.
○ 삼성전자 #2… 혁신적인 기술, 아름다운 디자인
“바보상자를 깨는 것이 혁신입니다!”
지난해 3월 삼성전자는 ‘크리스털 로즈’ 액정표시장치(LCD) TV를 공개했다. 이 제품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무형’의 TV라는 점. 투명한 크리스털 소재를 이용해 검은색과 붉은색 계통의 ‘로즈 레드’가 어우러진 제품이었다. 이 제품이 주목을 받은 것은 바로 ‘기술’에 있었다. 네모 이미지를 깨는 것이 목표였던 삼성전자는 그 해법을 크리스털에서 찾았다. 기존의 플라스틱 느낌이 아닌 투명한 유리공예 작품과도 같은 이미지를 주려는 의도였다. 또 붉은색 로즈 레드를 입히는 데는 과거처럼 TV 표면에 색을 입히기 위해 스프레이를 뿌리는 방식에서 벗어나 친환경 디자인 공법을 적용했다. 환경 규제 대상인 휘발성유기 화합물(VOC) 발생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바보상자 이미지를 깨려는 노력은 2005년 공개된 ‘V자형’ TV인 ‘로마 LCD TV’부터 시작됐다. 삼성전자 디자인팀은 “당시 LCD TV는 멀리 놓고 브랜드를 떼놓으면 어느 회사 제품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비슷비슷했다”며 “단순 사각 기계가 아닌 사람과 소통하는 도구로 형상화하려 했다”고 말했다. 이후 2006년에 와인 잔을 형상화한 ‘보르도 TV’가 공개됐고 이듬해 탄생한 ‘2007년형 보르도 TV’는 ‘경복궁 근정전’의 처마 곡선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
기술이 곧 디자인이라는 명제는 올해 특히 두드러졌다. 최근 공개된 발광다이오드(LED) TV는 29.9mm의 얇은 두께가 핵심. 이를 ‘핑거 슬림’이라 표현한 삼성전자는 얇은 두께 제조를 통해 디자인 혁신을 표현한 셈이다. 여기에 ‘그라데이션’(경계선의 색이 희미하게 변하는 효과), 물방울 이미지를 형상화한 ‘워터 드롭 라이팅’ 등의 디자인을 통해 자칫 약해 보일 수 있는 얇은 이미지에 무게감을 실었다.
‘얇게 더 얇게’라는 표어는 휴대전화 디자인에서 결정적 승부로 인식되고 있다. 올해 상반기(1∼6월) 삼성전자의 글로벌 시장 전략 기기인 ‘울트라 터치’에서도 마찬가지. 유기발광다이오드(AMOLED)를 넣었고 ‘풀 터치’ 방식임에도 키패드를 끼웠다. 그럼에도 두께는 12.7mm에 불과하다.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커뮤니케이션즈(DMC)부문 무선사업부 개발실 이병국 수석은 “많은 기능을 지원하면서도 얇은 두께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 삼성전자 #3…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디자인
삼성전자는 디자인 주체가 제품이지만 그 주제는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이라 믿고 있다. 2006년 삼성전자는 최고경영자 모임에서 △디자인 우수 인력 확보 △독창적 디자인과 사용자 환경(UI) 체계 구축 △창조적인 조직문화 조성 △금형기술 인프라 강화 등의 내용을 기본으로 하는 4대 디자인 전략 선포식을 열었다. 이와 함께 ‘디자인=아이디어 전쟁’이라는 개념을 소중히 여겨 ‘디자인 뱅크 시스템’도 활용하기로 했다. 모든 디자인 및 아이디어를 저장해 활용하기 위한 것이다. 또 글로벌 디자인 네트워크를 위해 미국, 영국, 이탈리아, 일본, 중국, 인도 등 6개국에 해외디자인연구소도 만들어 활용하고 있다.
최근에는 제품이 아닌 패키지에도 디자인을 강화하겠다는 전략을 발표했다. 최지성 삼성전자 사장을 비롯한 임원들은 최근 회의를 열고 다음 달 경기 수원 사업장에서 있을 ‘품질 평가 전시회’에 패키지 부분도 포함하겠다고 결정했다. 이 전시회는 매년 7월 열리는 경쟁업체 전자 제품들의 품평회다.
삼성전자가 내놓은 패키지 전략은 ‘패키지 에디션’. 하나의 제품에 여러 가지 패키지 디자인을 선보인다는 것으로 친환경 포장을 사용하고 소비자가 구입할 때마다 일정액을 환경단체에 기부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상품 전략팀 패키지디자인 파트 신현호 책임디자이너는 “더는 패키지가 포장 역할에만 머물지 않고 브랜드와 제품을 알리는 하나의 매체 역할을 겸한다”며 “업체들이 제품 디자인 못지않게 패키지 디자인으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섹션 디자인=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