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교육과학기술부는 사교육비 절감 대책의 하나로 외국어고 입시 개선 방안을 내 놓았다. 하지만 학부모들이 지나치게 어렵게 출제돼 외고 입시 문제의 핵심이라고 지적한 듣기평가에 대해서는 개선 방안을 내놓지 않았다. 도대체 얼마나 어렵게 출제되는 것일까. 대원, 대일, 명덕외고의 영어 듣기평가 문항 중 10개를 추려내 영어 전공 대학생과 중학교 영어 교사들에게 풀어보게 했다.
●영어권 국가 체류경험의 차이
외고 듣기평가 문제를 푼 서울대, 고려대, 한국외국어대의 영어전공 대학생 10명 가운데 10개 문항을 다 맞힌 학생은 3명 뿐이었다. 9개를 맞힌 학생은 2명, 7개는 1명, 6개는 2명이었다. 4개밖에 못 맞힌 학생도 2명이나 됐다.
대학생들의 성적은 대체로 영어권 국가 체류 기간에 따라 달랐다. 10개 문항을 모두 맞힌 학생 가운데 3명은 영어권 국가 체류 기간이 1년 이상이었다. 6개와 4개를 맞힌 학생 4명은 모두 6개월 미만이거나 아예 체류 경험이 없었다. 대학생들은 해외 체류 경험이 문제를 푸는 핵심 열쇠인 것 같다고 지적했다.
박정은 씨(고려대 영문과 3학년)는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만으로 공부했다면 전혀 접하지 못할 표현이나 관용구가 상당히 많다"며 "예를 들어 문제에 나온 'take the plunge(이것저것 궁리 끝에 결정을 내리다)' 같은 표현은 대학에 와서야 접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hold the mayo(마요네즈를 빼주세요)'와 같은 표현은 해외 체류 경험이 있으면 쉽지만 그렇지 않으면 어렵다"며 "마치 해외 체류 경험이 있느냐 없느냐를 가리는 듯 했다"고 말했다.
이일화 씨(한국외대 영미문학전공 4학년)는 "현재 고3 학생의 영어 과외를 하고 있는데 수능 외국어영역 문제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외고 듣기평가가 어렵다"며 "대화의 속도가 원어민이 원어민과 대화할 때의 속도만큼 빠르기 때문에 해외 체류 경험이 없는 학생이 풀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안신영 씨(고려대 영문과 2학년)도 "문제 가운데는 영어권 국가의 식생활이나 음식문화, 스포츠 문화를 알지 못하면 상대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지적했다.
●교사들 "학교 수업만으로는 외고 듣기평가 못 풀어"
교사들은 대화에 사용된 단어, 대화 속도, 대화 길이 등 정규 교육과정 내에서 출제된 문제는 없다고 입을 모았다. 학교 교육만 열심히 받은 학생이라면 풀 수 없다는 것.
영어 교사 6년차인 이진영 여의도중학교 교사는 "중학교 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친 학생들이라도 이 듣기 문제를 풀 수 없다"며 "일반적으로 중학교 듣기 문제의 경우 두 사람의 대화가 10줄을 넘지 않는데 외고 문제는 20줄 정도로 2배 이상 길다"고 말했다.
문제 유형도 여러 번의 사고와 추리를 해야 풀 수 있을 정도로 난해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박은하 분당 청솔중학교 영어 교사는 "듣고 해석하는 직청직해(直聽直解) 능력뿐만 아니라 들으면서 동시에 추리력을 요하는 난도가 높은 문제들"이라며 "일선 학교에서는 사실상 영어 독해에 대한 학습위주로 교육과정이 이뤄져 이런 유형의 영어 듣기에 대한 충분한 학습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영어 교사 5년차인 차민경 서울 사당중학교 교사는 "중학교 교과서에 등장하는 듣기평가는 대부분 일상생활을 소재로 한 문제인데 외고 듣기평가는 한 주제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며 "수능에서는 독해 문제로 출제되는 그래프 해석 문제가 듣기평가 문제로 나올 정도"라고 말했다.
●외고-중학교 교사-학부모 해법 '동상이몽'
외고 듣기평가 문제가 어려울수록 학부모들은 결국 사교육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다. 서울 잠실지역 중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한영외고에 다니는 이모 군은 초등학교 1학년 때 영어 학습지를 시작으로 어린이 전문 어학원, 외고 전문 어학원, 미국 유학 1년 등의 비용으로 중학교 3학년 때까지 9290만 원을 썼다. 이 가운데 미국 유학 비용이 5000만 원이다. 해외 유학까지는 아니지만 초등학교 4~6학년까지 매 학년 방학 중 국내외 영어캠프에 보내는 비용도 1000만 원에 육박한다.
서울의 한 외고 관계자는 "듣기 평가는 외국어에 재능 있는 우수한 학생들을 뽑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며 "듣기평가 실력이 다소 떨어지면 내신이나 구술 면접 등에서 만회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중학교 영어 교사들은 "외고가 이기주의에 빠져 사교육비에 신음하고 있는 학부모들을 방치하고 있다"며 "듣기평가 난도를 낮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최미숙 '학교를 사랑하는 학부모 모임' 상임대표는 "학교에서 철저한 수준별 수업을 통해 잘 하는 아이들은 그 수준에 맞게 가르쳐야 하고 그 다음 외고에서도 중학교 우수반 아이들 수준에 맞춰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을 문제로 출제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교과부는 이달 초 "영어 사교육 유발 요인의 하나인 난도 높은 외고 영어 듣기평가 방법을 개선하기 위해 시도교육청과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 교과부는 외고들이 개별적으로 출제하고 있는 듣기평가를 교육청이 참여한 공동출제로 전환하는 것을 검토 중이며 출제 과정에 중학교 교사들이 참여하는 것도 검토하고 있다.
김기용기자 k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