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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식 칼럼]‘밥그릇’에 가로막힌 교육과정 개편

입력 | 2009-06-18 21:25:00


탈 많은 교육계에 또 하나의 뇌관이 도사리고 있다. 대통령 직속 국가교육과학기술자문회의가 올해초부터 초중고 교육과정을 개편하는 일을 진행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어떤 과목을 가르치느냐를 새로 결정하려는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미래의 인재 육성을 위해 온 나라가 지혜를 모으는 숭고한 작업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교육계 내부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권력 투쟁의 장’이 되고 있다.

교육病의 근원 고치는 수술

교육과정 개편을 통해 어떤 과목이 필수가 되고 선택 과목이 되느냐는 교사에게 일자리가 걸린 문제다. 교사를 양성하는 대학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필수과목에서 밀려나면 대학의 해당 전공 졸업생은 교사로 취업할 수 있는 길이 거의 막혀버린다. 교육계는 벌써부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개편 내용에 따라 갈등의 폭발이 예상된다.

잘못 짜인 교육과정은 ‘만병의 근원’이다. 현재 초중고교에서 적용되고 있는 제7차 교육과정이 대표적인 사례다. 현 교육과정은 일본의 유토리 교육을 모델로 하면서 학습량을 이전보다 30% 축소했다. 학생들에게 선택권을 준다면서 한 과목을 또 여러 개로 쪼개 놓았다. 고교 2, 3학년이 배우는 국어는 화법 독서 문법 문학 작문 등 6개로 나뉘었다. 과거에는 국어 과목에 같이 포함됐던 것이었다.

학생들은 이 가운데 일부만 수강하므로 실제 학습량은 6차 교육과정과 비교하면 절반 이하에 불과하다. 교육과정 자체가 이전의 70% 수준으로 줄어든 데다 또 일부만 선택하기 때문이다. 대학 교수들이 이구동성으로 걱정하는 신입생들의 학력 저하는 여기에서 시작되고 있다. 공부해야 하는 절대량이 줄어든 것이다.

‘과목 쪼개기’에 따라 전체적으로 고교 2, 3학년을 위해 개설된 과목은 78개에 달하지만 학생들은 22개만 이수하면 된다. 어려운 과목은 듣지 않고 쉬운 과목에 편중되는, 교육적으로 치명적인 부작용이 나타났다. 수학 과학은 기피 과목이 됐고 물리와 미적분을 배우지 않은 학생들이 이공계 대학에 입학했다.

교육과정 개편이 포연 가득한 싸움터가 된 것도 7차 교육과정이 도입된 이후다. 학생들이 잘 선택하지 않는 과목의 교사는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교사들이 ‘제자의 미래’를 걱정하기보다 ‘과목의 미래’를 지키는 데 급급한 모습이다. 사교육 경감에도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학습량과 수준이 낮아지면서 입시 준비를 더 많은 사교육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일본 정부는 유토리 교육이 학력 저하를 야기하자 이를 폐기하면서 ‘교육 재생(再生)’이라는 말을 썼다. 얼마나 심각했으면 ‘다시 살린다’는 표현을 사용했을까. 우리도 교육과정 개편을 미룰 수 없다. 교육계 내부 구성원 누구에게도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일에 정부가 뛰어든 용기는 평가할 만 하다. 하지만 일부 손을 보는 정도의 개혁을 하려면 안 하느니 못하다.

교육계 내부 이기주의 극복해야

그만큼 치열한 의지를 정부가 갖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직 최종 결정이 되지 않았으나 고교 3개 학년 전체로 ‘선택 중심 교육’을 확대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현 교과과정의 부작용을 막기는커녕 고교 1학년까지 더 확대하는 것이다. 개혁이 아닌 퇴보다.

그러면서 정부는 ‘사교육과의 전쟁’을 내세운다. 사교육 대책은 이번에도 과거에 나왔던 것들을 다시 모아 놓는 데 불과했다. 사교육에 관한 한 나올 만한 아이디어는 다 나왔으며 기상천외한 대책은 없다는 얘기다. 정부가 교육 문제를 놓고 ‘전쟁’의 각오를 다진다면 교육과정 개편처럼 공교육 내부의 개혁과제에 대해서도 당당히 맞서야 한다.

정부는 학생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반드시 가르쳐 국가와 개인의 미래에 대비한다는 교육철학을 보여야 한다. 기왕에 칼을 든 이상 제대로 된 수술을 기대한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