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방글라데시의 무하마드 유누스 그라민은행 총재(오른쪽)가 19일 이화여대 국제교육관에서 열린 ‘사회갈등 해소와 국민통합’ 학술회의에서 강연하고 있다. 전영한 기자
‘사회갈등 해소와 국민통합’ 학술회의
정치학회-이화여대 평화학硏주최
동아일보 부설 화정평화재단 후원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갈등구조의 원인과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한 학술회의가 한국정치학회와 이화여대 평화학연구소 주최, 동아일보 부설 화정평화재단 후원으로 19일 이화여대 국제교육관에서 열렸다. ‘사회 갈등 해소와 국민 통합’을 주제로 한 이날 회의에서는 2006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무하마드 유누스 방글라데시 그라민은행 총재가 빈민층의 자활을 도와준 마이크로크레디트(무담보 소액대출) 운동이 갈등 해결에 기여한 과정을 소개했다. 이남영 한국정치학회 회장은 개회사에서 “6·25전쟁을 경험하고 남남(南南)갈등을 겪는 한국 사회는 갈등 연구의 본고장이라 할 만하다”며 갈등 해소방안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배용 이화여대 총장은 축사에서 “사회 안팎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 시점에 사회 갈등을 치유하고 국민 통합을 이끌어내는 담론의 장을 여는 것은 시의적절하다”고 평가했다.
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김기현 기자 kimkihy@donga.com》
■ 2006 노벨평화상 수상 유누스 그라민은행 총재 기조연설
“가난은 대물림 아닌 시스템 문제
빈부격차 줄여야 사회갈등 해소”
그라민은행은 치타공대학 캠퍼스 옆의 작은 마을에 사는 주민 몇 명을 고리대금업자에게서 해방시키려는 목표로 1976년 시작됐다. 무담보소액대출은 작은 사업이지만 은행이 거절한 주민들에게 대출의 길을 열어줬다. 1983년 서민은행인 ‘그라민 빌리지 뱅크’를 만들었고 이것이 전국적인 은행으로 성장했다. 현재 800만 명이 대출자이고 이 중 97%가 여성이다.
그라민은행은 돈을 빌려가는 사람들에게 자녀들을 학교에 진학시키라고 권고하고 있다. 교육의 기회를 통해 인생이 완전히 변화되기도 한다. 빈곤의 원인이 무엇인지 질문하다 보면 항상 같은 답이 나온다. 빈곤층의 대물림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만든 제도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가정이든 부잣집이든 아이들의 잠재력에는 차이가 없다. 단지 사회적 환경 때문에 이런 재능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라민은행을 운영하면서 사회적 위기도 해결하는 방안을 구상했다. 빈곤, 빈부격차, 사회적 괴리감 같은 요소들은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킨다. 빈부격차가 사회갈등 원인의 하나인 만큼 이런 차이를 줄이는 것이 갈등 해결 방안이다. 조금만 다른 각도로 생각하길 권한다. 위기는 오히려 최고 기회이기 때문이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사람들은 조금만 고치면서 변화를 추구하지 않곤 한다. 그러나 뭔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고민하기 시작한다.
현재의 금융위기에서 빠져나와 전 세계가 제대로 가동될 때를 생각해 보자. 지금의 문제를 야기한 시스템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지, 아니면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 진일보한 방향으로 가야 할지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과거 시스템으로 복귀하는 것은 재난을 의미한다. 이 기회를 이용해 과거에 우리가 기대했고 필요로 하는 새로운 제도를 만들고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특정한 사람, 배타적인 부유한 사람만을 위한 시스템이 돼서는 안 된다.
이윤을 극대화하는 기업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타심을 발휘해 이윤보다는 인류를 위해 활동하며 사회의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도 있다. 후자를 사회적 사업(social business)이라고 한다. 그라민은행과 세계적 유제품 업체인 다농이 합작한 것이 좋은 사례다. 다농은 방글라데시에서 영양실조를 겪는 어린이들을 위해 특별 요구르트를 생산했다. 특징은 투자자에게 얼마나 많은 배당금을 돌려주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어린이를 영양실조에서 벗어나게 하느냐로 기업 활동의 성공 여부를 평가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윤을 극대화하는 기업이 없어져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이들의 투자가 사회적 사업을 지원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협력할 때 갈등을 극복하고 훨씬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정권 잡고 있는 측에서
상대방에 많이 양보해야”
명지대 김형준 교수(사진)는 최근 한국 사회의 이념 지형은 중도가 두꺼워지는 추세라고 분석했다. 과거에는 진보와 보수가 균등하게 대세를 이루고 중도는 약한 ‘쌍봉(雙峯)형’이었던 이념 지형이 중도층이 두꺼워지는 ‘단봉(單峯)형’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직전인 5월 15일 동아일보와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자신을 ‘중도’라고 규정한 응답이 39.8%로 가장 많았고 이어 ‘보수’(33.3%) ‘진보’(21.9%)의 순이었다.
그러나 김 교수는 “이념적 중도화가 진행되고 있지만 이념 갈등은 오히려 증폭되는 역설적인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자신을 중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개별 정책 이슈에 대해서는 분명한 이념적인 성향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 특히 진보와 보수가 이슈와 정책에 대해 경쟁하고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해 ‘나쁘다’고 느끼는 배타적 감정을 가지면서 갈등이 커진다고 김 교수는 분석했다. 그는 이념 갈등의 해법으로 “정권을 잡고 있는 측에서 상대방의 가치를 배격하지 말고 대담한 양보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분석에 대해 동의대 전용주 교수는 “설문조사에서 중도라고 답변한 응답자 중에는 중도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부동층이나 무당파층이 많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화여대 서보혁 교수는 “일단 중도 강화 현상은 이념 갈등 해결의 긍정적 신호”라며 “이런 현상이 안정적인 것인지는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치가 지역주의 강화
선거-정부제도 개편 필요”
목포대 김영태 교수(사진)는 “선거 때마다 지역에 따라 투표 결과가 크게 갈리는 지역주의 투표 성향이 상당 기간 지속될 것”으로 예상했다. 자신이 특정 지역 사람이라고 인식하는 ‘지역 일체감’과 특정 정당이 자기 지역을 대변하고 있다고 느끼는 ‘정당 일체감’ 등이 투표 행위에 강하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특히 “정당의 지역적 정치 대표성이 지역주의 투표에 가장 큰 영향을 주고 있다”며 “정치적 요인이 지역주의의 핵심적 영향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현재의 지역주의 투표는 정치 지도자나 정당의 정치적 동원에 의해 주민들이 반복적으로 특정 정당을 지지하면서 심리적으로 정당 일체감이 강해진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지역주의 투표 현상은 지역주의적 정당 구조의 해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며 “지역주의 정당 구조를 뒷받침하는 현행 선거제도의 개편이 가장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동국대 박명호 교수도 “정당이 지역 갈등 구조를 더욱 정치화하는 현재 정치 구조에 문제가 있다”며 “선거제도뿐만 아니라 국회와 정부제도 전체를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세대 이소영 교수는 “정치권력을 잃어버리거나 권력을 쥐었던 경험이 없는 지역에서 지역을 대표하는 정치 지도자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가 나타난다”며 “제왕적 대통령제하에서 선거에 패한 쪽이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식의 ‘정치 게임’을 중단시킬 수 있는 정치 구조 개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진보-보수 가치관 공존
세대간 대립폭 크지 않아”
부산대 황아란 교수(사진)는 동아일보와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의 여론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한국 사회에서는 자유보다는 질서와 평등을 중요한 가치로 인식하는 경향이 모든 세대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자유보다 질서 중시, 대북 지원 반대, 국가보안법 존속 선호 등의 보수적인 특성과 자유보다 평등 중시,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에 대한 거부, 사회복지 확대 지지 등의 진보적인 특성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는 자유보다 질서를 중시하는 보수주의 경향이 높지만 자유와 평등이 상충할 때는 평등을 중시하는 진보적인 경향이 강한 것으로 분석됐다. 그러나 38세부터 51세까지의 이른바 ‘민주화 세대’는 평등이나 질서보다 자유를 중시하는 비율이 다른 세대보다 높았다.
주요 정책 쟁점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 대북 지원은 모든 세대에서 찬성보다 반대가 많았고 나이가 많을수록 반대하는 경향이 높았다. 국가보안법 폐지도 전체적으로 찬성보다 반대가 많았지만 세대 간 격차가 나타났다. 특히 38∼42세의 ‘민주화 성취 세대’는 국가보안법 폐지 찬성 비율이 43∼51세의 ‘민주화 투쟁 세대’나 20∼37세의 ‘신세대’보다 높았다.
그러나 황 교수는 “전반적으로 한국 사회는 정치적 가치관이나 정책적 쟁점 등에서 이념적으로 세대 간 격차는 있지만 갈등의 폭이 그리 크지 않다”며 “세대별로 이질적이기보다 동질적인 특성을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고 결론 내렸다.
“젊은 층 탈물질주의 성향
인터넷등 대안정치 선호”
배재대 김욱 교수(사진)는 “최근 한국 정치사회의 가장 큰 변화는 정치적 균열(갈등) 구조의 다변화(多變化)”라고 분석했다.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던 지역갈등이 약화 혹은 변화하는 대신 이념갈등과 세대갈등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정치문화 변동과 갈등 구조의 다변화는 장기적으로 사회갈등을 조정하고 통합하는 정치적 능력을 증대시켜 민주정치를 튼튼하게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 교수는 “특히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탈(脫)물질주의적 가치(post-materialistic values)가 부상하면서 기성세대의 물질주의적 가치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고 진단했다. 물질주의적 가치는 국가의 질서 유지, 강한 군사력, 고도 경제 성장 등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탈물질주의적 가치는 인간적인 사회, 환경 보전, 국민의 참여와 권한 확대 등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목원대 장수찬 교수는 “탈물질주의적 시각으로 접근하면 보수 정당의 장기적 패배가 명약관화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어떤 속도로 진행될지는 알 수 없다”고 지적했다.
서강대 서복경 교수는 “선호 정당이 별로 없는 새로운 유권자가 늘어날수록 거리의 정치, 인터넷 정치 등 대안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며 “기존 정당이 과거처럼 물질주의적 가치에 기반을 두고 새로운 유권자에게 접근하면 괴리가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