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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칼럼/이태동]문화권력, 검은 휘장을 걷어라

입력 | 2009-06-20 03:51:00


영국 시인 토머스 그레이는 그의 유명한 시 ‘시골 묘지에서 쓴 비가(悲歌)’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고요한 맑은 빛을 발하는 수많은 보석들이/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운 동굴 속에 잠겨 있고/수많은 꽃들이 아무도 가지 않는 황야에서 그 향기를 헛되이 뿌린다.’ 그레이가 노래한 이렇게 슬픈 현상은 자연에서만 일어나지 않고 인간 사회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무질서하고 모순된 사회 현상을 바로잡기 위해 유토피아적인 비전으로 진실만을 추구한다는 문단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1990년대에 어느 젊은 문학 평론가가 문단을 지배하는 문화 권력의 문제점을 지적해서 한참 동안 적지 않은 논란을 일으켰지만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났다.

우리 문단의 주류를 이루는 문화 권력은 문학의 질적 향상을 이룩하는 등 많은 부분 긍정적으로 작용했지만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때가 없지 않았다. 이를테면 문화 권력이 학연과 지연 또는 이념으로 높은 벽을 쌓았기 때문에, 문학적인 재능은 있지만 서클에서 소외된 자는 절망하거나 문학을 포기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그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새로이 생겨난 많은 수의 문예지는 소외 그룹에 작품 발표의 지면을 넓혀주고 문학 인구의 저변 확대를 유도했다. 그러나 그것 또한 문학의 질적 저하를 가져올 수 있는 위험을 노출시켰다.

재능있지만 인맥없는 작가들

문단에 군림하는 문화 권력의 장벽 때문에 능력이 있으나 자의식이 강하고 영악하지 못한 일부 작가는 잠재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스스로 국외자 길을 걷거나 망각 속에 묻혀버린다. 이는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서양에서도 유대인이기 때문에 생전에 전혀 빛을 보지 못했던 20세기의 비극적인 천재 작가 프란츠 카프카가 그러하고 나치가 통치하던 독일로부터 탈출하려다 실패하자 자살을 한 비평가 발터 베냐민도 이와 유사하다. 하지만 지연 혈연 학연으로 얽힌 우리의 문화 환경은 서양보다 더욱 편협하고 폐쇄적이지 않은가.

2007년 겨울 필자는 영세한 모 출판사의 간곡한 청탁에 못 이겨 소외된 작가 A 씨의 창작집 해설을 쓴 경험이 있다. 작품을 읽어가는 도중 나는 나의 편견에 대해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작품의 수준이 기대와는 달리 여러 문학상을 수상한 대부분의 유명 작가 못지않게 훌륭했기 때문이다. 필자만의 느낌이 아니었다. 창작집이 출간되고 난 후 작품을 읽은 서울대 교수 세 사람도 필자와 같은 견해를 가졌다. 그러나 어느 주요 신문이나 문예지도 그의 작품에 대해 한마디 언급을 해주지 않았다. 그 작품집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는 다시 침묵 속에 묻혀 버렸고 곰팡내 나는 습기 찬 골방에서 절망 속의 굶주림과 싸워야만 했다. 그의 작품이 이렇게 빛을 보지 못하게 된 원인은 인맥을 펼칠 만한 학벌이 없고 너무나 가난한 데다가 문학 작품을 쓰는 일밖에 모르는 어리석은 은둔자적인 태도 때문이리라. 작가 생활 30여 년이 지난 지금 현재 그의 전 재산은 책과 그릇 몇 개가 전부다. “갈 곳도 없고 혈혈단신 부랑신세, 아직도 글을 쓸 수 있는 여력을 주신 신께 감사할 뿐이다.”

그가 벼랑 끝과도 같은 가난한 상황에서 창작집을 낼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술위원회와 같은 국가의 지원금에 의해서가 아니라 문학과 일치된 삶을 굽히지 않고 처절하게 살아가는 삶의 자세와 문학 가치를 알아본 지방의 어느 독지가가 후원회를 만들어 헌신적으로 도왔기 때문이다.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는 어느 예술가에게 이 후원회의 회장처럼 아름다운 도움의 손길을 펼치는 일은 우리 사회에서는 매우 드물지만 서양에서는 흔히 있다. 19세기 영국의 위대한 시인이자 평론가인 새뮤얼 콜리지는 돈이 없어 목사가 되려고 했지만 부유한 도자기 업자였던 토머스 풀과 조사이어 웨지우드의 도움으로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었으며 말년에 그의 병을 치료했던 의사 제임스 길먼의 집에 머물며 그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임종 때까지 글을 쓸 수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사회적인 편견 때문에 지하에 묻혀 있는 전설적인 무명작가라는 사실이고, 후자는 이미 영국 문단에서 천재로 이름이 나 있었던 큰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풍요속 빈곤’ 만들지 말았으면

다행히 위에서 언급한 작가는 문학이 무엇인가를 아는 지적인 독지가의 도움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나마 작품을 쓰는 중이다. 재능은 있지만 세속적인 처세에 어둡고 학연이나 지연이 없다는 이유로 버림받고 소외된 영역에서 가난과 싸우면서 근근이 생명을 이어가는 비운의 예술가가 그만은 아닐 것이다. 문화 권력은 변화와 다양성이 있는 보다 큰 조화로운 그림을 그리도록 편견의 검은 휘장을 걷고, 지하의 그늘진 곳까지 빛을 비춰 ‘풍요 속의 빈곤’을 만들지 말았으면 한다. 개인적으로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큰 낭비이기 때문이다.

이태동 문학평론가·서강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