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 이미지 벗고 온화한 감독 변신…
요즘 허정무 축구대표팀 감독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있을까. 허 감독의 얼굴은 웃음 그 자체다. 언제 어디서든 환한 표정이다. 말투도 부드러워졌다. 19일 오후, 스포츠동아에 방배동 자신의 집을 공개한 날엔 웃음소리가 더욱 컸다. 2시간 동안 이어진 인터뷰 내내 환한 미소로, 때론 큰 웃음으로, 때론 진지한 태도로 자신의 축구철학과 가족에 대한 사랑, 선수들에 대한 애정, 아픈 기억들, 16강을 향한 집념 등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주위에서는 허 감독을 두고 ‘사람이 많이 변했다’고 한다. 선수들은 물론이고 코치들이나 스태프, 협회 관계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그래서 가장 궁금한 ‘부드러운 감독’으로 변한 배경부터 물었다. “원래 부드러운 남자예요. 그런데 요즘 왜 유해졌다고 할까.(웃음) 과거엔 좀 직설적인 면이 많았죠. 모든 것을 원리원칙대로 처리하다보니, 딱딱하게 비쳐졌던 거죠. 그런데 힘든 시기를 거치면서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죠. 내 지시를 받아들이는 선수들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게 된 거죠. 그랬더니 서서히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기존에 내 방법이 틀렸던 것이죠.”
사실 허 감독은 강성이었다. 예전 대표팀이나 프로구단 감독 시절,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으면 곧장 맞받아쳤다. 꺾이는 법이 없었다. 휘는 것보다는 차라리 부러지는 길을 택했다. “요즘엔 달라졌죠. 한 번 더 생각하게 되더라구요. 언짢은 얘기라도 먼저 귀담아 들으려고 하고, 상대편에 서서 상대를 이해하게 된 것이죠. 그런 노력들이 나를 변하게 하고, 대표팀을 변하게 했다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빨래 개는 남자 허정무
이는 참을성으로 이어진다. 그는 대표적인 사례를 하나 들었다. “최근 (기)성용이나 (이)청용이 같은 경우, 예전 같으면 한마디 했을 겁니다. 조금 나태해진 모습이 보였거든요. 선수들이 한참 떠 있을 때는 자신이 한없이 좋은 줄만 압니다. 하지만 지적하지 않고 일부러 기다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선수들이 직접 깨닫고 느끼는 것이니까요. 꾹 참았다가 이란전이 끝난 뒤에 청용이와 걸어가면서 ‘좀 더 노력하길 바란다’며 살짝 전했죠.” 쓴 소리가 아니라 애정이 담긴 선배의 조언으로 선수들의 정신을 바로 잡아나갔다.
이는 곧 소통의 리더십과 맥을 같이 한다. 대표팀 내 의사소통이 원활해진 것은 바로 허 감독이 스스로 변했기에 가능했다. 박지성이 주장을 맡으면서 소통이 잘 되긴 했지만, 그 전에 허 감독이 먼저 마음의 문을 열었기에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코칭스태프와 선수들, 선수단 내 신구의 조화가 잘 이뤄진 것도 바로 마음의 문이 열렸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도 많이 변한 모습이다. “나이가 먹다보니 그렇게 됐다”는 그는 “예전엔 상대가 먼저 알아주길 바랐는데, 이젠 그렇게 하지는 않아요. 내가 잘못했다고 판단되면 솔직하게 시인하는 태도로 바뀐 것이지요. 철이 들었다고 보시면 됩니다”라며 껄껄 웃었다.
이런 모든 변화는 결국 ‘긍정의 힘’이 됐다. 받아들이는 사람 입장도 생각하고, 전달하는 방법을 바꾸면서 모든 것이 잘 풀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허정무호의 키워드는 ‘긍정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경기를 살펴보면 선제골을 먹고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정신도 바로 여기에서 기인한다.
벌써 내년 남아공월드컵으로 시선을 돌린 허 감독은 “철저한 준비와 피나는 노력을 한 뒤에 결과를 기다리겠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누가 그러던데요. ‘곧 죽어도 좋으니 저런 남편하고 하루라도 살아보고 싶다’고 말이에요.” 한국축구를 7회 연속 월드컵 본선으로 이끈 허정무 감독. 가장으로서 모습은 어떠냐는 물음에 부인 최미나(55) 씨는 주저 없이 말했다. 남편의 대답. “화초에 물을 주고, 빨래도 직접 개어놓고, 설거지부터 하는데 이 정도면 만점 아닌가요?”
19일 서울 방배동 자택에서 가진 ‘소문난 잉꼬’ 허 감독 부부와의 인터뷰는 시종 유쾌했다. 남편은 목 디스크 수술을 받은 부인의 목에 두른 스카프를 고쳐 매주며 살짝 어깨를 감싸는 남다른 정을 과시했다.
○남편, 아빠 그리고 할아버지
당당한 필드의 지휘관이지만 집에서는 자상하다. 허 감독이 “집안에 선인장을 기르면서 수 년 간 앓던 아내의 천식이 싹 가셨다”며 대뜸 ‘선인장 예찬론’을 늘어놓자 최 씨는 “남편은 최고였고, 최고이고, 영원히 최고”라고 미소를 짓는다. 여자가 가장 싫어하는 게 ‘축구 얘기하는 남자’라고 했던가. 허 감독은 최 씨에게 축구 얘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최 씨는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주로 신문, 방송을 보고 알지만 오래 살다보니 대표팀 결과 정도는 구분되더라고요. 지거나 비기는 날에는 혼자 방에 들어가 바둑판을 펼친 답니다”라고 했다.
아빠로서의 모습? 역시 만점. 두 딸(허화란, 허은)은 엄마가 질투할 만큼 아빠를 따른다. 최 씨는 “이이(허정무)가 합숙이 없을 때는 딸들을 직장까지 차로 데려다줘야 직성이 풀려요. 시집가지 않은 막내는 심성이 너무 착해 결혼시키기 싫다고 입버릇처럼 말할 정도”라고 웃었다. 허 감독도 “품성과 됨됨이가 좋고, 겉보기만 화려한 실속 없는 사람은 딱 질색”이라며 사윗감 조건을 공개했다.
부부는 큰 딸 화란씨가 데려온 쌍둥이 손자(강하준, 예준)를 내내 자랑했다. 방긋방긋 웃는 손자들을 꼭 안은 채 “우리 손자들 너무 예쁘지 않느냐”고 쉼 없이 되물었다. “자식을 가졌을 때보다 훨씬 행복하다면 지나친 표현인가요?”
"여보, 나 화초 가꾸는 꽃남이야"
○한국에서 감독을 한다는 것
2007년 12월. 허 감독의 대표팀 사령탑 복귀는 대단한 이슈였다. 히딩크부터 베어벡까지, 7년여 간의 외국인 감독 시대에 마침표를 찍었기 때문. 1년 정도는 비난과 질타에 시달렸다. 성적이 좋지 않으면 ‘경질설’이 돌았다. 물론 후임으론 외국인 사령탑이 거론됐다. 17일 이란전을 마친 뒤에는 “허 감독은 예선용이고, 외국인 감독이 월드컵에 가지 않겠느냐”는 황당한 질문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허 감독은 단호하다. 그는 “막연히 ‘외국인’을 거론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대주의적 발상일 뿐”이라고 선을 그었다. “평생축구로 먹고 살았습니다. 축구로 명예와 혜택을 입었고, 지금껏 사랑받는 까닭도 거기에 있지요. ‘마지막 도전’이란 생각이 부임 때 느낀 감정이었답니다. 지금도 초심은 변치 않았어요.”
가족들의 격려가 컸다. 2000시드니올림픽에 출전한 허 감독이 워낙 고생을 심하게 한 탓에 또 어려운 길을 택한 그를 최 씨와 두 딸은 뜯어말렸다고. 화란 씨는 “아빠에 대한 나쁜 기사가 나오면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려요”라고 했다. 허 감독은 “월드컵 본선이 끝난 뒤 판단해 줬으면 해요. 예선이 끝나 ‘후련 하겠다’는 지인들이 있지만 솔직히 아니죠. 오히려 답답해요. 의지에 비해 환경은 그렇지 못하니. 젊은 감독? 세대교체를 나이로 따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원로부터 젊은이까지 두루 배워야죠. 나이가 아닌 사고에 의한 세대교체가 이뤄져야 해요. 늘 깨어있는 사고로 대표팀을 이끌겠습니다”라고 자신했다.
○북한 축구…월드컵, 미쳐보고 싶다!
“(정)대세나 (안)영학이가 전화 한 통 해주면 얼마나 좋아?” 44년 만에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은 북한축구로 화제를 돌리자 허 감독은 기다렸다는 듯 농담을 던진다. 본선행을 조기에 확정한 한국이지만 남은 2경기 또한 부담이 컸다. ‘유종의 미’란 측면도 있었지만 한국이 졸전했다면 북한은 ‘최선을 다하지 않은 한국 때문에 예선 탈락했다’고 생떼를 부릴 가능성도 있었다. 그는 정대세의 배탈사건(?)을 떠올리며 “4월 북한과 홈경기 끝나고 얼마나 황당하던지. 어느 시대인데, 음식물에 약을 타?”라고 고개를 갸웃했다. 허 감독은 1년여 앞으로 다가온 월드컵을 내다본다. 체력, 정신력, 조직력이 일치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판단이다. “일단 16강에 오르면 무서울 게 없고, 못할 게 없어요. 한민족 특유의 신바람은 누구도 말릴 수 없죠. 그 때는 또 다른 신화를 작성할 수도 있어요. 축구란 모르는 겁니다. 기죽지 않고 덤벼야죠. 한 번 제대로 ‘미쳐보고’ 싶어요.”
그러나 조기에 베스트 11을 정할 생각은 없다. 남아공행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까지 혹독한 경쟁 체제이다. “미리 정하면 경쟁관계가 깨질 뿐이죠. 백업 요원들은 포기하고, 기존 멤버들은 나태해질 수밖에 없어요. 엎치락뒤치락해야 발전합니다. 큰 틀에서의 변화는 없지만 일부는 언제든 바뀔 수 있어요.”
최현길 기자 choihg2@donga.com
남장현 기자 yoshike3@donga.com
사진=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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