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장성은 수세기 동안 소홀하게 방치되었다. 말할 것도 없이 만리장성은 인간의 손으로 지은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물이다. 하지만 지금은 위대했던 과거의 묘비가 되어, 장성을 가로지르는 협곡에서 그리고 장성을 뚫고 지나가는 구름 속에서 청나라의 몰락을 가져온 부패와 퇴폐에 대해 침묵으로 항의하고 있다.”》
서양인이 본 청대의 만리장성
이 책은 트로이 유적을 발굴한 고고학자이자 성공한 사업가인 하인리히 슐리만이 1865년 청나라에서 2개월, 일본에서 3주간 체류하면서 겪은 일을 담은 기행문이다. 슐리만은 젊은 시절 무역으로 큰 부를 거머쥔 뒤 고대유적 탐사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경제활동을 중단하고 세계여행을 떠났다. 그의 나이 43세 때였다. 그는 인도, 이집트 카이로를 거쳐 중국과 일본을 둘러본 뒤 미국 동해안, 쿠바, 멕시코를 지나 프랑스 파리에서 여정을 마쳤다. 남다른 언어 능력을 가진 ‘언어의 달인’이었던 슐리만은 20개 언어로 쓴 18권의 일기를 남겼다.
당시 청나라와 일본은 외국인 여행자의 안전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곳이었다. 청나라는 아편전쟁에서 패한 뒤 맺은 난징조약으로 거액의 전쟁 배상금을 물고 항구 다섯 곳을 개항해야 했다. 몰락해가는 일본 도쿠가와 이에야스 정권에선 외국인에 대한 강한 증오감과 문화적 쇼비니즘으로 가득 찬 척양파 사무라이들이 외국인은 물론이고 개국을 주장하는 자국인의 암살까지 빈번히 저지르던 때였다. 하지만 슐리만은 대담한 모험을 감행했다. 심지어 온도계와 자, 거울을 갖고 다니면서 수치와 용량, 금액을 꼼꼼히 기록했다.
중국 베이징에 들어서서 슐리만은 끝없이 펼쳐진 성벽을 보고 경탄했지만, 잡초만 무성한 쯔진청(紫禁城)과 아편중독자, 거지떼, 허물어져 가는 집 등 쇠락한 풍경에 실망한다. “신들의 성전과 찬란한 선조들의 수많은 건축물이 쇠락하도록 그냥 방치하는 엄청난 태만함은, 중국 통치자와 그의 백성들의 정신적 몰락과 도덕의 타락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일 터다.”
만리장성의 관문 중 하나인 구베이커우에서 슐리만은 ‘프랑스 파리의 대로를 활보하는 옷을 입은 오랑우탄’ 같은 기분을 느낀다. 중국식 복장과 변발을 하지 않고, 붓이 아닌 연필을 쓰는 서양인을 중국 사람들은 신기해했다. “만리장성을 보러 왔다”고 하자 중국인들은 돌덩이를 보러 온 서양인을 향해 큰 소리로 웃어댔다. 슐리만은 만리장성을 홀로 오른 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웅장하며 감상할수록 태곳적 거인들이 만들어낸 환상적인 작품”이라고 감탄했다.
일본으로 넘어간 슐리만은 훈도시 하나만 걸치고, 이마에서 정수리까지 머리를 밀어버린 남자들을 보며 중국과 사뭇 다른 정취를 맛본다. 일본인의 깍듯한 태도와 친절함, 단정하고 간소한 살림살이와 분재를 가꾼 정원 등을 묘사했다. “여기 일본에 있으면 유럽에서 꼭 필요하다고 여기는 욕구들이 대개는 인위적으로 조장된 것이며, 또한 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많은 가구들이 사실은 전혀 필요하지 않은 것임을 깨닫게 된다.”
난생처음 남녀 혼탕을 목격한 슐리만은 무척 놀란 듯하다. “세상의 질책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관습적인 윤리 규범에 의해서 비난받거나 처벌받지도 않으며, 벗은 몸에 대해 아무런 수치심도 느끼지 못하는 ‘이 가련한 중생들이여!’”
역자는 이 말에 대해 “일본은 메이지 시대에 들면서 남녀 혼욕을 법으로 엄격하게 금지했다. 오늘날 남성 여성 전용 사우나를 찾기 힘들 정도로 혼욕이 일반화된 슐리만의 조국 독일을 보면서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썼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