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비꼬기 왜?
만약 당신이 축구 전문가가 되고 싶다면? 밤을 꼬박 새우며 해외 경기 중계를 볼 필요 없다. 대신 전문가로 대접받기에 그럴 듯한 매뉴얼만 외우면 된다.
전문가가 대수냐고 조롱하며 '당신을 ○○전문가로 만들어 주겠다'고 호언장담하는 '전문가' 시리즈가 요즘 각종 인터넷 게시판과 커뮤니티를 휩쓸고 있다.
'전문가' 시리즈의 원조는 지난해 8월 네이버 해외축구 게시판에 올라 온 '당신을 축구 전문가로 만들어 주겠다'는 글. 이 게시물이 뒤늦게 화제가 되면서 각종 '전문가'시리즈로 패러디되고 있다. "축구는 절대~볼 필요 없습니다. 매뉴얼만 숙지하시면 됩니다"고 시작되는 축구 전문가 시리즈는 "일단 축구전문가가 되기 위해 좋아해야 하는 선수들이 있다"고 귀띔한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마니아층의 지지를 받는 선수나 팀들을 꼽아야 전문가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조언의 핵심이다.
"클래식 레벨에서는 펠레와 마라도나를 꼽아선 안 됩니다. 그들을 꼽는 것은 다른 축구 전문가들에게 무시당할 수 있습니다. 제일 좋은 매뉴얼은 마르코 반 바스텐이나 플라티니 정도입니다. 그 때 태어나지 않았어도 괜찮습니다. 스페셜 영상 하나 안 봐도 됩니다."
이 매뉴얼에서는 프리킥 달인으로는 데이비드 베컴보다 시니사 미하일로비치, 최고 팀으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보다 리버풀, 국가로는 잉글랜드보다 체코를 아는 척하라고 추천했다. 더 전문가연 하고 싶다면 "댓글마다 체코 덜덜덜 하시면 됩니다"라는 조언도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대충 이 정도입니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박지성 맨유 가고 나서부터 EPL 봤다고 절대 고백하지 마십시오. 캐무시 당합니다"라는 충고도 잊지 않는다.
'전문가'시리즈는 '축구 전문가'를 시작으로 '클래식 전문가' '수학 전문가' '화장품 전문가' '영화 전문가'등 각종 시리즈로 무한 생성되고 있으며 심지어 '야동 전문가'까지 등장했을 정도다. '축구 전문가' 시리즈처럼 '음악은 절대~들을 필요 없습니다. 매뉴얼만 숙지하면 됩니다' '수학 공부 절대~할 필요 없습니다. 매뉴얼만 숙지하면 됩니다'라고 쉽게 변형된다.
이런 '전문가 시리즈'의 유행은 블로그나 커뮤니티 활동을 통해 자칭, 타칭 전문가들이 늘어나면서 생겨난 '유쾌한 전복'놀이로 해석된다.
수학, 클래식 등 학문적 영역은 그들만의 언어로 이야기하며 대중과 소통하려는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전문성=이해하기 힘든 내용'이라는 공식이 은연중 성립됐다. 또한 자동차나 화장품 등 소비 제품에 관한 전문가 평가는 일반인들이 구매하기 힘든 고가 제품 위주로 이루어져 전문성을 검증받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조유경 씨(24·서울 강남구 삼성동)는 "소위 전문가의 추천으로 비싼 미백 화장품을 사용했지만 별로 효과가 없었다"며 "특히 화장품 사용 후기들은 국내 중저가 제품들은 올라오지도 않을 뿐더러 제품 홍보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일반 대중과 동떨어진 '전문성'을 비꼬며 '전문가는 대중이 알아듣기 어려운 용어나 잘 모르는 사람, 접하기 어려운 제품을 거론하는 사람'이라는 식의 조롱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 일례로 '클래식 전문가' 매뉴얼에선 "지휘자 쪽에서는 카라얀과 번스타인을 꼽아선 안된다. 그들을 꼽으면 다른 클래식 전문가들에게 무시당할 수 있다. 제일 좋은 매뉴얼은 아르농쿠르나 칼뵘 정도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몰라도 괜찮다"는 내용이 있다. 제품을 대상으로 한 '전문가' 시리즈에는 "국산 브랜드를 언급하지 말라"는 조언이 꼭 들어있다.
김찬석 청주대 광고홍보학과 교수는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일부 전문가만 공유하던 정보에 대중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며 "특히 대학 진학율이 80%로 육박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나도 전문가'라는 '정보 대중주의'가 빨리 확산됐다"고 '전문가' 놀이의 확산 배경을 설명했다.
김 교수는 "전문가들이 특정 이해관계에서 중립적이고 사회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전문성을 키워 대중들의 불신을 극복해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우경임기자 woohah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