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 속의 소수자들/곽차섭 임병철 엮음/343쪽·1만6500원·푸른역사
1520∼1565년 유럽에서 가톨릭교회가 ‘이단(異端)’이라는 죄목으로 처형한 3000여 명 중 2000여 명이 재세례파였다. 1525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동한 재세례파는 가톨릭의 영아세례를 부정하며 스스로 판단능력을 가진 성인에게 세례를 준 종교적 소수자였다. 그 때문에 당시 만연한 가톨릭교회의 부패를 개혁하자며 들고 일어선 프로테스탄트 개혁가들도 재세례파를 종교적 방종을 일삼는 무리로 취급했다. 하지만 재세례파가 사회적 혐오와 혹독한 탄압을 받았던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들이 프로테스탄트가 요구한 ‘교회와 세속의 분리’에서 한발 더 나아가 ‘참된 기독교인은 정치와 단절해야 한다’는 무정부주의적인 이념을 내세워 교회와의 타협 여지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에는 언제나 소수자가 존재한다. 수적인 소수자가 있고 역학관계에서 약자인 정치적 사회적 소수자도 있다. 국내 학자 11명의 공동 저작인 이 책은 역사 속 소수자들이 당시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주목한다. 이들이 정의하는 소수자는 “자신이 지닌 특징으로 인해 사회의 주류 지배집단으로부터 차별받는 비주류 하위집단이나 그 구성원, 사회집단의 범주에는 속하지 않지만 주류에 반하는 사상이나 생각을 가진 개인이나 공동체”다.
18세기 중반 이후 영국 사회에서 몰리(molly·여성 역할을 맡은 동성애 매춘 남성)가 받은 탄압은 성적 소수자의 위상을 보여준다. 18세기 초까지만 해도 남성 동성애를 크게 문제 삼지 않았던 당국은 직장(直腸)에서 정액이 검출된 남성을 공개교수형에 처할 만큼 강력히 처벌하기 시작했다. 저자는 성적 취향과 남성성을 연결시키지 않았던 사회가 ‘남성은 능동적으로 삽입하는 존재, 여성은 수동적으로 남성을 받아들이는 존재’라고 규정하면서 몰리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불법적인 제3의 존재가 됐다고 말한다. 18세기 자본주의 발달로 공적·경제적 영역은 남편이 맡고 사적·가정적 영역은 아내가 맡는 구분이 뚜렷해진 것과 관련이 있다고 설명한다.
‘아우슈비츠 무슬림’은 이슬람에 대한 서구의 뿌리 깊은 편견과 인간다움의 정의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아우슈비츠의 무슬림은 ‘살아 있는 시체’처럼 뼈만 앙상하게 남아 죽을 날만 기다리는 아우슈비츠 수감자의 대다수를 일컫는 수용소 내 은어다. 이 말은 ‘이슬람 신도는 신의 뜻에 무조건 복종하는 자’라는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우슈비츠에서 생환한 유대계 이탈리아 학자 프리모 레비가 증언한 ‘아우슈비츠 무슬림’은 인간다움에 대한 과제를 남겼다. 수용소 체제와 타협해 ‘아우슈비츠 무슬림’이 되지 않은 생존자들이 인간다운 것인지, 수용소의 폭력을 있는 그대로 받아내며 산송장이 되고 죽어간 이들에게서 인간다움을 찾아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다.
맬컴 엑스와 마틴 루서 킹에 앞서 노예제와 인종차별 철폐를 위해 투쟁한 흑인노예 출신의 프레드릭 더글러스(1818∼1895)는 소수자 중의 소수자가 걷는 길의 험난함을 보여준다. 그는 스스로가 노예 상태에서 도망친 신분이었고 인종차별 철폐운동가 집단 내에서도 백인에게 인정받아야 영향력을 키울 수 있었다. 링컨의 대통령 당선을 도운 그는 남북전쟁 당시인 1863년 링컨이 노예해방령을 선포하고 연방의회가 흑인의 입대를 허용하는 법을 통과시키는 데 공헌했다. 하지만 그는 미국 사회에 만연한 인종 편견 때문에 숨진 뒤 50여 년이 지난 20세기 중반까지도 제대로 된 역사적 조명을 받지 못했다.
화장품 기업 코티의 창업자 프랑수아 코티(1874∼1934)는 성공한 소수자가 왜 다른 소수자를 적대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사례다. 그는 프랑스 식민지 코르시카 출신으로 프랑스 최초의 향수 기업인 코티를 세워 성공했다. 최선의 가치를 ‘프랑스 민족’에 둔 그는 이민자에게는 냉혹했고 실업자나 소외 계층 프랑스인에게는 호의를 베풀었다. 그는 극우정당의 자금을 후원했고 1933년에는 ‘프랑스연대’라는 극우당을 창당했다. 오늘날 장마리 르펜의 극우당인 ‘민족전선’을 지지하는 당원이 대부분 성공한 이민자 출신의 프랑스 시민이라는 점에서 코티는 그들의 선배인 셈이다.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