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의 황제’를 떠나보내며
이것을 비보라고 해야 할까. 너무나 갑작스러운 소식이라 이 상실감은 슬픔 이전에 허망함으로 다가온다. 아직 정확한 사인조차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난 것만은 확실하다는 것을 아는 수많은 팬들의 발걸음이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향하고 있다. 그의 집은 벌써 수많은 발걸음의 목적지가 되었다. 마이클 잭슨에게는 인생의 종점이 되었으나 마치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듯, 사람들은 그리로 모여든다. 이것은 순례다.
엘비스-비틀스 반열에 오른 흑인
그렇다. 잭슨은 이미 신화가 되었지만, 그렇게 신화의 2막은 열린다. 우리는 그 현장을 목격하고 있다. 사실은 거기서부터가 진정한 신화다. 늘 신화는 영웅의 죽음을 통해 그 영웅을 영원의 반열에 올리면서 현재형이 되지 않는가. 존 레넌과 조지 해리슨이 죽었지만 비틀스의 신화는 계속되고 있다. 33년 전인 1977년에 세상을 떠난 엘비스 프레슬리의 망령은 여전히 ‘그가 살아 있을지 모른다’는 소문에 시달린다. 그의 집 ‘그레이스랜드’는 순례자들의 성지가 되었다.
마이클 잭슨. 무엇이 그를 신화의 주인공으로 만들었을까. 아마도 그의 생애는 1982년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는 미증유의 히트 앨범 ‘스릴러(Thriller)’가 나온 것이 바로 그해. 이 앨범의 성공이 없었다면 아무리 6세에 데뷔했고 13세에 롤링스톤 표지를 장식했더라도 그의 신화는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듯 팝 스타의 신화는 구체적인 현실에서 출발한다. ‘스릴러’는 팝의 역사에서 새로운 시기가 시작됐음을 알려주었다. MTV의 시기, 비주얼의 시기,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무의미의 시기’였다. 저항의 메시지나 열창 대신 현란한 몇 개의 동작이면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다. 그렇다고 잭슨이 노래를 못한다거나 춤을 못 춘다는 뜻은 아니다. 그만큼 정교한 리듬앤드블루스(R&B) 창법을 구사하는 가수는 역사상 없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신화의 주인공이 되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가십에 묻힌 음악적 성과 조명을
미국의 흑인 거리 뒷골목에서는 ‘퍼블릭 에너미’ 같은 급진적인 힙합 뮤지션들이 흑인의 현실을 격앙된 톤으로 폭로하고 있었지만, 팝의 세상은 그런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때는 이른바 ‘별들의 전쟁’을 위해 미국 예산을 퍼붓던 레이건의 시대였다.
이것은 아이러니다. 잭슨은 최초로 팝의 신화가 된 흑인이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스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이후로 잭슨 한 명뿐이다. 그러니 어쩌면 지배당하던 계층의 영웅이 지배자의 대열에 낀 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 자기 정체성을 지우고 싶어 했다. ‘성형’의 배경에도 그런 마음의 움직임이 있다. 그는 팝 세상의 진정한 왕이 되기 위해 흰색이 되고 싶어 했고 그것은 결국은 치명적인 부작용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추억은 의외로 단순하다. 몇 개의 강렬한 요소가 추억을 장악한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앨범이 발매되고 난 다음 해의 그래미상 시상식장에서 잭슨이 부르던 ‘빌리 진’을. 엉거주춤 짧아 보이는 바지와 휘황한 장갑과 검은 선글라스는 어딘지 잘 안 어울리는 듯했지만 문 워크를 비롯한 그의 춤과 간드러지는 R&B 창법은 그 모든 것이 신화의 없어서는 안 될 소품이 되었음을 전 세계에 알리는 순간이었다. 마치 영원의 한 단면인 양, 그때의 잭슨은 시간을 벗어나 내 기억 속에 깊게 각인되어 있다. 그것이 나만의 추억은 아닐 것이다. 팝은 그처럼 강렬한 하나의 자극이 전 세계의 팬들에게 복제되도록 한다.
너무나 많이 팔려서, 너무나 흔해서 마이클 잭슨은 오히려 평가받지 못했던 면도 없지 않다. 잭슨이 남긴 음악적인 공헌은 구체적으로는 흑인 현대 대중음악의 틀 내에서 평가돼야 할 것이다. 흑인 대중음악의 가장 광범위한 장르 이름이라 할 수 있는 ‘리듬앤드블루스’를 보편화한 잭슨의 음악적 성과는 지금부터 제대로 평가되어야 한다. 피터팬 콤플렉스, 성형충동 등의 가십 때문에 오히려 그의 음악은 제대로 대중에게 전달되기 힘들었다. 팝 스타는 죽어도 죽지 않는다. 어쩌면 지금부터가 시작일지 모른다.
성기완 시인 밴드 ‘3호선 버터플라이’ 기타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