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랏차차… 모래판은 삶의 원동력” 그에게 씨름은 힘겨운 삶을 지탱해준 원동력이었다. 모래판에 서는 순간 새로운 의욕이 샘솟았다. 남편과의 사별, 교통사고 등 역경을 극복한 정정순 씨(위)가 26일 전남 구례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전국여자천하장사 씨름대회에서 딸보다 어린 박현정 양을 장기인 배지기로 쓰러뜨리고 있다. 사진 제공 국민생활체육 전국씨름연합회
제1회 여자천하장사대회 개막
“울지 마라. 질 때마다 울면 내는 수천 번도 더 울었을 기다.”
26일 제1회 국민생활체육 전국여자천하장사 씨름대회가 열린 전남 구례실내체육관. 대회 첫날 매화급(60kg 이하) 예선전이 한창인 모래판 뒤편에서 한 선수가 울고 있는 선수를 위로하고 있었다. 마치 어머니와 딸처럼 보이는 두 사람은 실은 방금 1회전에서 맞붙었던 정정순 씨(57·경북)와 박현정 양(18·충남)이다. 둘의 나이 차는 서른아홉 살. 정 씨는 스물네 살인 자신의 딸보다도 어린 상대를 눈 깜짝할 새에 배지기로 내리 두 번 꺾었다. 정 씨는 이번 대회 참가자 중 최고령 선수. 환갑을 앞둔 그는 18년째 모래판에서 땀을 쏟고 있다.
정 씨가 씨름을 시작한 건 1991년. 경북 포항시 북구에 사는 그는 주위의 권유로 동네 씨름대회에 출전했다. 가족들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그때 이후로 정 씨는 거의 매일 씨름 연습을 했다. 변변한 연습장도 없던 시절이었기에 포항 북부해수욕장 백사장을 뒹굴어야 했다. 나가는 대회마다 우승을 휩쓴 정 씨는 동네 인기 스타가 됐다.
하지만 1년 뒤 남편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딸과 두 살 어린 아들을 남겨둔 채…. 그때부터 정 씨는 생계를 홀로 책임져야 했다. 초등학교 식당 일, 과일 장사 등 닥치는 대로 뛰어다녔다. 힘든 시간 속에서 그의 몸과 정신을 지켜준 건 다름 아닌 씨름이었다. 체급 구별이 없었던 그 시절, 80kg이었던 그는 자신보다 체격이 큰 여장부들을 모래판에 눕혔다.
2000년 다시 한 번 불행이 찾아왔다. 교통사고로 장 파열이라는 큰 상처를 입었다. 지금의 대장, 소장 모두 인공 장기다. 몸무게는 20kg 이상 빠졌다. 하지만 사고 후에도 샅바를 놓지 않았다. 건강을 되찾게 해준 것은 씨름이었다. 그가 가장 쾌감을 느낄 때는 1회전에서처럼 배지기로 상대를 눕힐 때다. 그는 2회전에서는 밭다리와 안다리 기술을 잇달아 성공시켰다. 3회전에서는 이번 대회 준우승을 차지한 박민경(21·부산)과 만났다. 첫판을 밀어치기로 따냈지만 둘째, 셋째 판을 되치기로 내주며 8강 진출에 실패했다. 그는 치열한 삶을 멈출 수 없는 것처럼 씨름 인생의 끝도 정해 놓지 않았다. 그는 “내년에는 딸과 함께 대회에 출전할 생각에 설렌다”고 말했다.
28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대회는 전국 16개 시도에서 320명이 참가했다. 매화급, 난초급(65kg 이하), 국화급(70kg 이하), 대나무급(75kg 이하), 무궁화급(80kg 이하) 5개 체급으로 나눠 우승자를 가리고 체급 구별이 없는 천하장사도 뽑는다. 26일 매화급에서는 심인숙(33·충북)이 정상에 올랐다. 임혜미(28·충북)는 대나무급 결승에서 최강자 공혜선(22·부산)을 두 판 연속 배지기로 꺾었다. 이날 경기장을 찾은 1000여 명의 팬들은 여자 장사들의 기술 씨름을 보며 환호했다.
구례=한우신 기자 hanwsh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