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오후 경기 의정부시 호원고등학교 학생들이 ‘학생자치법정’을 열어 교칙을 어겨 벌점이 누적된 학생들을 재판하고 있다. 이날 자치법정에서는 학생들 스스로 판사, 변호인, 배심원단을 맡아 징계 종류와 수위를 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의정부=김미옥 기자
의정부 호원고 학생자치법정 ‘재판’ 현장
“김 군은 실내화 미착용으로 22번이나 벌점을 받았는데 이렇게 자주 걸린 이유가 있나요?”(검사)
“가방이 너무 무거워서 실내화를 못 가져왔습니다.”(피고인)
“실내화를 들고 다니려면 가방이 무겁고 부피가 커서 불편이 많습니다. 다른 죄를 저지르지 않았고 반성하고 있는 점을 감안해 징계수위를 정해주십시오.”(변호사)
26일 오후 6시 경기 의정부시 호원동 호원고교 3층 과학 실험실에서는 ‘2009학년도 제2회 학생자치법정’이 열렸다. 호원고는 복장 규정 위반은 1점, 무단외출은 2점, 교사 지시 불이행은 5점의 벌점을 주고 있고 반대로 봉사활동을 하거나 수업에 열심히 참가했을 때는 상점 2점씩을 주는 ‘상벌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날 법정에 선 학생들은 1학기가 시작된 이후 누적벌점이 15점이 넘은 학생들. 재판부는 학생자치법정 동아리 소속 2학년생들이 맡았다. 앞서 5월에 열린 제1회 자치법정에서 징계를 받았던 학생들이 배심원단으로 참가했다.
“치마가 짧다고 지적을 받은 이후에도 또다시 같은 이유로 적발된 건 반성을 하지 않은 것 아닌가요.” 선생님 대신 친구를 징계하기 위해 법복을 입은 검사의 추궁은 매서웠다. 변호인을 맡은 학생도 “지적을 받은 뒤 치마 길이를 최대한 늘렸다. 하지만 치마를 줄이면서 치맛자락을 많이 잘라내 더 늘릴 수가 없었다”며 친구를 변론했다.
1시간 반 동안 모두 7명의 벌점 기준 초과 학생에 대한 신문을 차례로 마친 뒤 재판장이 휴정을 선언했다. 배심원단은 옆 교실로 자리를 옮겨 ‘형량’을 어떻게 정할지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일부 배심원이 “자신이 어긴 교칙과 관련한 교육용 손수제작물(UCC)을 제작하게 하자”고 제안했으나 “시험 기간이라 UCC 제작은 너무 부담이 크다”는 반대의견에 부닥쳤다.
30분 뒤 배심원단에게서 양형 의견을 전달받은 재판부는 벌점 초과 학생들에게 각각 자신이 어긴 교칙과 관련한 팻말을 제작한 뒤 1주일간 교내에서 캠페인을 벌이라고 판결했다. 교사 지시 불이행으로 벌점을 받은 학생에게는 해당 교사에게 편지를 쓰라는 벌칙도 부과했다. 판사는 “자치법정이 부과한 징계를 따르지 않으면 학교 차원에서 추가로 징계를 받게 된다”는 주의사항을 알려준 뒤 폐회를 선언했다.
자치법정이 끝난 뒤 학생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복장불량으로 징계를 받은 한 학생은 “선생님께 벌을 받을 때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는데, 나를 잘 이해하는 친구들에게 벌을 받으니 쉽게 수긍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판사를 맡은 이다영 양(17·2학년)은 “교과서나 방송을 통해 보던 법정에 실제 앉아보니 법이나 재판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호원고는 2008년 법무부로부터 학생자치법정 시범학교로 선정된 뒤, 학생들의 호응이 좋아 올해로 2년째 자치법정을 운영하고 있다. 호원고처럼 학생자치법정을 운영하는 중고교는 전국적으로 35곳에 이른다. 법무부는 이들 학교에 자치법정 프로그램 운영을 위한 교재 지원은 물론 대전 솔로몬 로파크를 통한 교사, 학생연수 등을 돕고 있다. 또 학생자치법정이 열리는 날에는 모니터링 요원을 파견해 개선할 점이 없는지 자문에 응하고 있다.
의정부=전성철 기자 daw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