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장 승리를 위해 필요한 것들
2049년 7월 5일 오후 2시. 상암동 로봇격투기 전용경기장엔 4강전을 치를 팀의 스태프와 대회 관계자들로 분주했다. 경기장에 일찌감치 도착한 카메라 기자들은 슈타이거 (베를린, 우승확률: 34/100)와 글라슈트 (서울, 우승확률: 6/100)를 찍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며칠간 세상은 수많은 억측과 과학적인 예측 그리고 신의 계시를 쏟아냈다. 오늘은 그들의 억측과 예측과 계시가 심판받는 날이다. 꿈의 4강전은 과연 누구의 데스 시그널을 뽑아내게 될까.
네 팀의 우승확률은 라스베가스 도박사들에 의해 재조정됐다. 무사시와 슈타이거의 확률이 가장 높았고, 졸리 더 퀸의 우승을 꼽는 도박사도 꽤 있었지만, 글라슈트는 여전히 주목의 대상이 아니었다. 글라슈트의 선전에 환호하는 서울의 관람객도 슈타이거나 무사시의 멋진 움직임에 훨씬 더 매료되었다.
"왜 이렇게 늦은 거예요?"
서사라가 허겁지겁 연구소로 뛰어 들어오는 최볼테르의 앞을 막고 다그쳤다. 오늘따라 그녀의 사자머리는 풍성하고 두 눈엔 날카로움이 더했다.
"오늘이 얼마나 중요한 시합인데, 어제 저녁엔 얼굴도 안비치고!"
'V32 티애라'를 글라슈트에 장착할 확률이 6/100으로 늘어났다. 이제 두 번만 이기면 된다.
"아, 미안! 노민선 박사가 소개해 준 인천성모병원 영상의학과 정용안 박사님과 미팅을 했어. 그 분 재미있는 분이시더라고. 로봇을 이용한 뇌졸중환자 재활치료에 대한 아이디어를 주셨는데 아주 기발해."
볼테르는 술이 아직 덜 깬 듯 흐린 눈으로 변명을 주절거렸다.
"미팅을 밤새 했단 말인가요?"
"얘기가 흥미로워 미팅 끝나고 술까지 한 잔! 왜, 무슨 사고라도 생겼어?"
"그게 아니라, 제대로 점검도 못 하고 시합에 들어가진 않을까 불안해서……."
M-ALI과의 8강전 때 글라슈트의 움직임은 정교하지 못했고, 특히 초반 움직임은 눈에 띄게 어색하였다.
"'파이널 체크'는?"
"어젯밤 내가 했어요."
볼테르가 제 엉덩이를 반 바퀴 돌렸다가 멈췄다.
"골반이 반 박자 빨리 돌던데, 얼라인이 제대로 안 된 거 아냐? 그것만 확인하자고."
사라가 팔짱을 끼고 안타까운 듯 말했다.
"몇 가지 부품만 새로 갈면 움직임이 눈에 띄게 좋아질 텐데요."
볼테르는 사랑이 가득 담긴 눈으로 슬며시 사라의 검은 손을 쥐고 볼에 입술을 댔다.
"지금 조건에서 최선을 다하면 돼. 괜한 걱정 마. 알았지?"
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볼테르는 글라슈트의 하체에 머리를 박은 채 마지막 점검을 시작했다. 한 시간이 지나고 또 한 시간이 흘렀다.
오후 4시, 슈타이거가 경기장에 도착했다.
작년도 우승 로봇답게 슈타이거와 그를 만든 마틴 구레츠키 박사는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취재진을 이끌고 등장했다. 쇼 케이스를 방불케 하는 기자회견이 잠시 열렸다.
"구레츠키 박사님, 먼저 4강전에 진출하신 걸 축하드립니다. 오늘 글라슈트와의 4강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안녕하세요? 먼저 저희 슈타이거에게 많은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특히 서울 관람객들의 전폭적인 성원에 힘입어 저희가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또 베를린의 시민들과 막스 플랑크 연구소 관계자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참, 저희를 후원해 주신 BMW에도요."
"박사님, 글라슈트는 '순간 공격력'이 매우 좋은데요. 이번 경기를 치르는 각별한 전략이라도 있으십니까?"
"저희 슈타이거는 잘 아시다시피 '돌려차기'가 일품입니다. 0.2초도 채 안 걸리는 파워 돌려차기가 8강전에 비해 한층 업그레이드됐습니다. 오래 시간을 끌지 않는 박진감 넘치는 경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동아일보 과학담당 이충환 기자가 물었다.
"구레츠키 박사님, 글라슈트의 장점이 뭐라고 파악하고 계십니까?"
"글쎄요, 4강까지 올라온 로봇은 모두 대단하지요. 좋은 승부가 될 것 같습니다."
"약간 모호한 답을 하시는군요. 글라슈트에 대한 분석은 이미 마친 상태신가요?"
구레츠키 박사가 이 기자에게 눈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답했다.
"솔직히…… 글라슈트를 세밀하게 분석하진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