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에서 김채식 성대박물관 학예사(왼쪽)가 1943년 위창 오세창(뒤쪽 자료화면 사진)이 고려 말에서 조선에 이르는 문인과 정치인의 서간과 시 등을 엮은 ‘근묵’을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조-고종-김정희-윤선도-권율…
“아내를 잃으신 슬픔에 놀라움을 누를 수 없습니다.…나는 일찍이 이런 상황에 익숙해진 적이 있기 때문에, 그 단맛과 쓴맛을 잘 압니다. 마음을 안정시키고 슬픔을 삭이는 데는, 종려나무 삿갓을 쓰고 오동나무 나막신을 신고 산색을 보고 강물 소리를 들으며 방랑하는 것이 제일입니다.” 조선 후기 서화가이자 문신인 추사 김정희가 지인의 상처(喪妻) 소식에 경험을 담아 쓴 위로 편지의 한 구절이다.
서화(書畵) 감식의 대가인 위창 오세창 선생(1864∼1953)이 고려 말부터 조선에 이르는 문인과 정치인들의 편지와 시 등 1136점을 1943년 엮은 글씨첩 ‘근묵(槿墨)’(성균관대 출판부)이 29일 한글로 완역돼 나왔다. 1136명의 작품 1점씩을 담은 근묵에는 사적인 서간 724점(63%)이 포함됐다. 문집의 편지들이 학술이나 문학 담론을 담았다면 근묵의 서간은 소소하고 때로는 비루한 일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1772년 6월 18일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는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가난 때문에 글을 읽지 못하는 현실을 토로했다. “초여름 이후로 집안 권속의 굶주림과 질병이 끊임이 없으니 마음이 복잡하여 책과 붓과는 거의 담을 쌓고 지냅니다.…쌀과 소금이 떨어지면 아녀자의 우는 소리에 마음이 흔들려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여 스스로 (학문과 정신수양을) 실행하다가 스스로 그만두고 맙니다.”
문인 윤선도가 늙고 병든 신세를 한탄하는 내용도 있다. 그는 말년에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감의 염려 덕분에 죽지 않고 나이를 한 살 더 먹었으나 노환이 날로 심하여 뼈대만 남았을 뿐”이라며 한숨을 짓는다. 조선의 기초를 닦은 정도전은 벗에게 병중의 고통을 호소했다. 그는 편지에서 “오래 침상에 누워 날마다 고통에 신음하고 있어 다시 일어나 사람이 될 가망은 전혀 없다”고 적었다.
문신이자 임진왜란 때 명장 권율은 어른에게 술자리 실수를 사과하는 편지를 썼다. 그는 “어제 질펀하게 술에 취해 예모(禮貌)를 크게 잃었습니다. 자리를 함께했던 여러 어른들이 너그럽게 이해해 주신다고 해도, 제 마음은 두려움에 떠니 어찌 식은땀이 나지 않겠습니까. 지금 편지를 받고 아울러 경계하신 절구(絶句)를 받으니 더욱 감사합니다”라며 고개를 숙였다.
정조의 사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서간도 있다. 정조는 1792년 9월 2일 친척에게 선물을 보내며 몇 구절 적었다. 그는 물목(物目·선물목록)에 ‘상림(上林·현 창경궁 춘당지 일대의 논으로 추정)의 벼 한 석’이라고 쓴 뒤 “금년 가을 풍년이 들어 소출이 배나 많아 전에 말로 보내던 것을 석으로 보낸다”고 썼다. 벼와 함께 보낸 ‘내원(內苑·창덕궁 옥류천 주변 지역)의 담배 두 봉’ 목록 아래에는 “토양이 적합하고 맛이 좋아 (담배로 유명한 평안남도) 삼등(담배)에 못지않다”고 품평했다.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