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안통해 法이 더 먼 이주여성… 이젠 법원이 다가간다
이주여성 이혼 4년새 5배로
소송 지원 창구는 턱없이 부족
본격 제도개선 나선 정부-법원
상담 - 통번역 서비스 확충
《2005년 결혼업체의 소개로 40대 한국인 농부와 백년가약을 맺은 태국인 여성 시리난(가명·35) 씨는 결혼 직후부터 시어머니의 구박에 시달려야 했다. “며느리가 태국에 자식을 놓아두고 시집왔다”는 동네 무당의 터무니없는 말 한마디가 화근이었다. 미운털이 박힌 시리난 씨는 친정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태국에 다녀왔다는 이유로 남편과 시누이로부터 집단 구타를 당한 끝에 뇌출혈 진단을 받기도 했다. 이웃의 신고로 간신히 도망친 그는 이혼을 결심했지만 한국어도 어눌하고 소송 절차도 잘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 다행히 지인의 소개로 최근 한국가정법률상담소의 도움을 받게 됐고 이혼 소송 끝에 이혼은 물론이고 900만 원의 위자료도 받게 됐다. 김민선 한국가정법률상담소 변호사는 “이 여성은 다행히 상담소의 도움으로 소송을 진행했지만 대다수의 다문화 가정 여성이 제대로 된 통역인을 구하지 못하고 국내법을 잘 몰라 증거 수집 등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
○ 다문화 가정 법률지원 턱없이 부족
국내 거주하는 외국인들은 주로 임금체불이나 국적취득 및 체류, 가정 문제 등으로 법률적인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이 가운데 소송까지 이어지는 사례는 이혼이나 자녀 양육에 관한 가사 사건이 대부분이다.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 가운데 이혼한 여성은 2004년 1567명에서 지난해 7962명으로 4년 사이 5배나 증가했다. 이들이 이혼 소송을 진행할 때 겪었던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보다 언어소통 문제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나 ‘공감’과 같은 일부 공익 변호사단체가 무료로 법률서비스를 지원하고 있지만 돕는 손길은 턱없이 부족하다. 국내에 외국인 노동자나 다문화 가정 전문 변호사가 적은 데다 저소득층에 무료로 법률서비스를 제공하는 정부 산하 대한법률구조공단조차 외국인 전담 창구는 아직 마련하지 않고 있다.
각종 소송 정보가 집약돼 있는 대법원 인터넷 홈페이지에도 영어를 제외하고는 다른 언어가 지원되지 않고 있다. 국내 체류 외국인 가운데 중국인이 절반에 달하고 외국인 이혼자 3명 가운데 2명이 중국인인 점을 감안하면 중국어 등 다른 언어의 지원이 시급한 상황이다.
성남중국동포의 집 김명옥 실장은 “다문화 가정에서 법정에 대동하는 통역인들은 대부분 이웃이나 친구들로, 전문 통역인이 아닌 데다 법률지식도 없어 제대로 변론을 못할 때가 많다”며 “소송 당사자가 국내에 아는 사람이 적어 증인이나 증거를 적절히 제시하지 못하는 점도 소송에 큰 약점으로 작용한다”고 말했다.
○ 다문화 가정 법률지원 시작
서울가정법원과 법무부는 지난달 19일 공동으로 전국 다문화 가정 상담실무자 60여 명을 초청해 국적 제도와 외국인의 이혼 소송, 체류 문제 등에 대한 교육을 실시했다. 법원과 정부가 다문화 가정을 위해 특강을 마련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강사로 나선 이명철 판사는 ‘아내가 가출했을 때’, ‘상대방이 재산을 빼돌렸을 때’ 등 상황별로 나눠 다양한 법적 쟁점을 쉬운 말로 설명했다. 이 판사는 “상담 실무자들이 다문화 가정의 배우자가 상대방의 문화나 처한 상황 등을 이해하도록 돕는 가교 역할을 해야 한다”며 “법원은 이들이 언어장벽 등으로 인해 소송에서 자기방어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제도 개선에 힘쓰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가정법원은 실제로 언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통역인 자원봉사자(영어, 중국어, 베트남어, 몽골어, 우즈베키스탄어, 러시아어, 일본어 등)를 지난 달 말까지 모집했다. 장기적으로는 이들을 활용해 외국인 전용창구를 개설할 예정이다. 아울러 법정 통·번역 지원시스템을 마련하고 통·번역 비용을 포함한 소송 구조 활동을 확대해 나가기로 했다. 대법원은 각종 소송 절차 안내서를 10여 개 언어로 번역해 올해 초부터 전국 법원에 배포하기 시작했다.
유원규 서울가정법원장은 “다문화 가정 자녀들의 법원 견학 프로그램이나 각종 지원단체와의 간담회도 열 계획”이라며 “최근 법원 내에 다문화가정지원연구모임을 신설해 다양한 지원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고 밝혔다. 권영수 법무부 국적통합정책단장도 “다문화 가정에서 출입국 및 체류 문제 등에 대해 의문점이 생겼을 때는 외국인 종합안내센터(국번 없이 1345)로 전화하면 18개 언어로 상담을 받을 수 있다”고 안내했다.
이종식 기자 bell@donga.com
▼“허술한 신고절차, 위장결혼 양산”
한국남편-외국아내 이혼사유
아내 가출-입국거부 등 많아
“신고때 법원 출석 거쳐야”▼
지난해 한국인과 외국인 간 국제결혼 건수는 3만6204건으로 한국민 혼인건수(32만7700건)의 11%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국내 신혼부부 10쌍 중 1쌍이 다문화 가정을 꾸린 셈이다. 반면 지난해 국내 다문화 가정의 이혼 건수는 1만1255건으로 한국민 이혼 건수(11만6500건)의 9.7%에 달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인 남편과 외국인 아내가 갈라선 가정은 7962건으로 2007년보다 39.5% 증가했다. 한국인 아내와 외국인 남편의 이혼도 전년보다 11.1% 늘어 국제이혼이 매년 크게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혼한 다문화 가정의 배우자 국적을 보면 중국(67.8%)이 가장 많았고 베트남(13.5%), 필리핀(3.4%) 등이 뒤를 이었다.
지난해 이혼한 한국인 남편과 외국인 아내의 동거 기간은 평균 2.7년이었으며 동거 기간이 5년 미만인 부부가 10쌍 중 9쌍이나 됐다. 이혼한 외국인 남편과 한국인 아내의 경우 동거 기간은 평균 5.6년이었고 동거 기간이 5년 미만인 부부는 3쌍 중 2쌍으로 나타났다.
한숙희 서울가정법원 부장판사가 2008년 100건의 국제이혼 판결 중 한국인 남편과 외국인 아내의 이혼 사유를 분석한 결과 아내가 가출해 이혼한 사례가 38.6%로 가장 많았다. △아내의 비자 발급이 거부되거나(22.8%) △입국 자체를 안 한 경우(21.1%) △입국한 뒤 자기 나라로 돌아간 사례(14.0%) △남편의 폭력 등으로 인한 가정불화(3.5%) 등이 뒤를 이었다. 다문화 가정이 깨진 이유의 대부분이 위장결혼이었던 것이다.
한국의 국제결혼 신고는 외국인의 혼인성립요건 구비증명서만 시·읍·면장에게 제출하면 형식적 심사만을 거쳐 혼인관계가 성립된다. 심지어 본인 확인 없이 우편으로 제출해도 혼인은 이뤄진다. 한 부장판사는 “위장결혼을 양산하는 허술한 국제결혼 신고절차를 고치기 위해 외국인 배우자를 법원이나 가족관계 등록기관 등에 출석시켜 혼인 의사를 직접 확인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위장결혼을 한 당사자들에 대해 형사처벌을 강화하고 국제결혼을 알선하는 중매기관에 대해 법적 규제를 강화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도 내놓았다.
한 부장판사는 “다문화 가정은 문화와 언어의 차이 등 어려움을 예상하고 선택한 결혼인 만큼 무엇보다 가족들의 따뜻한 배려와 차별 없는 대우가 있어야만 잘 정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종식 기자 bel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