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던 5월 23일 오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했다고 보고받은 순간,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이명박(MB) 대통령의 마음이 어땠는지 다 헤아릴 수는 없다. MB는 “애석하고 비통한 일”이라 했고, DJ는 “내 몸의 절반이 무너져 내린 것 같은 심정”이라 했다.
슬픔과는 별개로 당혹감을 느낀 쪽이 있었다면 MB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6월을 잘 넘길 수 있을지 불안한 기색이던 MB 정권 사람들은 조문(弔問)정국의 소용돌이에 잔뜩 웅크렸다. 겁을 먹었다는 표현이 과장이 아닐 것이다.
반면에 DJ는 ‘한줄기 빛’을 본 것일까. 그는 MB 정권의 수세(守勢)모드를 놓치지 않고 공세를 본격화했다. 노 전 대통령 추모를 ‘국민의 한(恨)풀이’로 등식화하고, MB를 ‘반(反)민주 독재자’로 낙인찍으며, “모두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 들고일어나야 한다”고 외쳤다.
DJ는 ‘메시아(Messiah)’가 되려는 꿈을 꾸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신통력은 바닥을 드러낸 것 같다. 지금 MB의 중도(中道) 행보에 대해 “궁여지책”이라고 굳이 폄훼하는 모습은 전직 대통령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서는 너무 초라해 보기가 민망하다.
반작용 부른 DJ의 억지 선동
설혹 MB가 실제로 반민주적이고 독재적이라 하더라도 DJ가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惡)의 편”이라고까지 국민을 몰아붙이며 반(反)정권 봉기를 선동하고 사회 분열을 꾀한 것은 DJ 자신에 대한 역사의 평가를 추락시킬 안타까운 우행(愚行)이었다. 지난날 그가 진정으로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민주화운동을 했던 것인지, 오로지 권력 쟁취를 위해 민주화운동이라는 수단을 택했던 것인지 세상의 의문을 자초했다. 너무나 투쟁적이고 갈등 지향적이어서 노벨 평화상 정신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 아닌지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더구나 DJ는 MB를 정치적으로 굴복시키려다 오히려 MB를 도운 꼴이 됐다. ‘MB가 특별히 잘하는 것은 없다 해도 DJ의 선동은 터무니없다’는 DJ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MB에게 ‘위험한 6월’의 보호막이 된 셈이다.
민주주의 위기론, 독재자론이 어느 정도 실체적 근거를 갖고 있었다면 조문정국을 타고 MB 정권을 궁지로 몰아넣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현실과 부합하지 않고 구시대의 민주 대 반민주, 독재 대 반독재 프레임을 억지로 끌어들인 것임을 많은 국민은 꿰뚫어보고 있었다. 이미 박물관에 들어간 낡은 틀을 꺼내 흔든 DJ는 시대와 함께 변하지 못한 인물임을 보여줬을 뿐이다.
국민이 현실에 불만을 갖고 있더라도 국민을 우민(愚民)으로 여기며 터무니없는 상징조작과 거짓으로 국민을 미신(迷信)의 포로로 만들려 해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상식을 벗어난 노욕(老慾)의 정치는 생명력이 없다. 이것이 2009년 오뉴월 정국이 남긴 한 교훈이다.
민주당과 반정권 시위전문세력도 깨닫는 바가 있어야 한다. 이들은 6월 민주항쟁 22주년의 날을 반MB 총궐기의 계기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민주당 의원들이 6월 9일 서울광장을 미리 점거해 정략성(政略性)을 드러냄으로써 이른바 ‘6·10 범국민 대회’는 국민의 자발 참여 동력을 잃었다. 또 직업시위꾼 집단이 깃발을 많이 펄럭일수록 순수한 시민들의 발길은 멀어져 갔다. 깨어 있는 국민은 이런 정당과 집단의 들러리나 설 만큼 어리석지 않다.
이들이 길거리에서 불법 폭력의 증폭세력으로 행동하고 있을 동안 많은 국민은 냉철한 눈을 뜨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민주보통선거로 국민의 뜻을 물어 국회를 구성한 정당이 허구한 날 아스팔트에 돗자리 깔고 반정권 투쟁이나 벌이려 해서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민주당이 이번에도 이를 깨닫지 못했다면 시계가 20년 전에 고정된 시대착오다. DJ와 노무현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도 민주당의 비극이다.
현 정권도 逆風에만 기대면 실패
그렇다고 교훈이 DJ나 민주당, 반정부세력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MB 정권과 반대세력은 서로 민심의 역풍(逆風)을 기대하는 ‘반사이익의 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야당도 거기에 머물면 희망이 없지만, 정권이 그 수준이면 국민이 더 불행해진다.
MB 정권은 오뉴월 정국에서 배울 뿐 아니라 자신들의 지난날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대선 기간 중 7·4·7(연 7% 성장, 국민소득 4만 달러, 세계 7대 강국)을 내세우며 경제대통령 이미지로 당선됐지만, 구체적 비전과 액션플랜 없는 공약이 국내외 악재에 허망하게 무너짐으로써 국민에게 깊은 실망을 안겼고, 정권의 탄력을 많이 잃었다. 결과 없는 약속 또한 생명력이 없음을 말해준다. 지금과 앞으로가 더 문제다.
배인준 논설주간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