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즘 특이한 강의실 경험을 하고 있다. ‘인문사회계를 위한 화학’이라는 계절수업에 수강생의 절반 정도인 청강생이 수강생 못지않게, 아니 더 열심히 화학공부를 한다. 얼마 전에 KBS의 박용태 PD를 중심으로 일반인이 과학책을 선정해 읽으며 공부하는 백북스라는 모임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었다. 강의가 끝나고 맥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동안 물리 천문 생물은 많이 접했지만 화학을 공부할 기회가 없어서 과학이 전체적으로 연결이 잘 안 된다고 한다. 그러다가 계절수업 이야기가 나왔는데 몇 분이 청강을 해도 좋겠냐고 물었다. 한두 번 들어 보려나 하고 별 생각 없이 그러시라고 했는데 거의 열 분이 예습과 복습을 해가며 열심히 강의를 따라와서 오히려 수강생이 자극을 받는 상황이 됐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는 것은 돈이 되는 경우, 돈이 안 돼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경우, 그리고 재미있는 경우로 나눌 수 있다. 자식을 위해 부모가 희생하는 일은 대개 두 번째 경우이고, 공부 대신 컴퓨터게임에 빠지는 모습은 세 번째 경우이겠다. 물론 재미있고 의미도 있고 게다가 돈까지 되면 최상의 콤비네이션이다. 위의 청강생들 경우는 딱딱할 줄 알았던 화학공부가 일단 재미있다고 느끼는 것 같다고 자평하는데, 문과생을 위한 과목의 특성을 살려서 ‘우리 몸에 들어있는 원자는 어디에서 왔나’라는 원초적인 질문으로 출발해 화학의 원리를 차근차근 배우니까 나 자신과 관련해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그래서 재미가 생기는 게 아닌가 싶다. 기원(origin)은 인간의 공통적이고 기본적인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금년이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간한 지 150년 되는 해이다.
현대과학은 물질 자체의 기원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다빈치 코드로 잘 알려진 댄 브라운의 소설을 영화화한 ‘천사와 악마’는 일루미나티라는 반(反)가톨릭집단이 유럽입자물리연구소에서 만들어낸 반물질(反物質·antimatter)을 훔쳐내 바티칸을 폭파하고 가톨릭을 파멸시키려 한다는 플롯이다. 영화의 마무리 부분에 로마 상공에서 물질과 상쇄되어 폭발하며 장관을 연출하는 반물질은 우리 주위의 물질세계를 구성하는 물질 입자와 질량 등 다른 성질은 같고 반대 전하를 가지는 입자이다.
흥미롭게도 반물질은 우주의 기원과 직결된다. 노자의 도덕경에는 도생일(道生一), 일생이(一生二), 이생삼(二生三), 삼생만물(三生萬物)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일생이의 일은 에너지, 이는 물질과 반물질이라고 볼 수 있다. 137억 년 전 빅뱅의 순간에 에너지로부터 거의 같은 양으로 생긴 물질과 반물질은 서로 상쇄되어 빛으로 바뀌고 남은 약간의 물질이 현재의 물질세계를 이루는 양성자 중성자 전자를 만든다. 이생삼의 이가 물질과 반물질이라면 삼은 양성자 중성자 전자인 것이다. 이 세 가지 입자에서 만물이 생긴다.
빅뱅이라는 단어가 인기 가수그룹 이름에까지 사용되는 요즘 우주의 기원과 우주의 진화를 개략적으로 이해하는 일은 한 사람의 품격을 높인다. 자기 자신의 기원을 아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물질세계를 다루는 과학을 공부할 때는 물질 자체의 기원을 짚고 넘어가면 공부의 의미가 살아나고 공부가 재미있어진다. 우주의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그 일부로 지구의 역사를, 또 지구 역사의 일부로 생명의 역사를 공부하게 된다. 중고교에서부터 큰 틀에서 통합적으로 과학을 공부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그래야 의미가 살아나고 과학 공부가 재미있어지기 때문이다.
김희준 서울대 화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