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 과학기술특별보좌관을 지내다 한국연구재단(NRF)을 이끌게 된 박찬모 이사장은 선진화된 기초연구지원시스템을 확립해 연구자들의 만족도를 높이겠다고 말했다.홍진환 기자
“실패 격려해주는 문화 정착돼야 노벨상 나와”
《2조6000억 원에 이르는 막대한 예산을 다루게 된 ‘노(老)신사’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잃지 않았다. 하지만 순간순간 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박찬모 한국연구재단 초대 이사장(74)은 1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연구재단 출범을 계기로 연구비 지원에 대한 발상의 전환을 시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국내 연구지원 규모 세계 톱 수준… 효율성이 문제
공정한 지원 이뤄지면 재외 석학들 꼭 돌아올 것
―한국연구재단으로의 통합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한국연구재단은 과거 한국과학재단, 국제과학기술협력재단, 한국학술진흥재단 등 각 기관이 따로따로 수행하던 업무를 하나로 합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입니다.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결합, 인문학과 정보기술(IT)의 결합 등 학자들의 연구는 융합을 지향하고 있는데 그것을 지원하는 기관이 나뉘어 있으면 복잡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런 점에서 통합 출범하는 한국연구재단은 미래형 학술 연구를 지원해 세계와 경쟁하도록 한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선진국과 비교해 국내 연구 지원의 수준은 어느 정도입니까.
“예전에는 선진국에 비해 부족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과학 분야의 경우 1970년대는 말할 것도 없고 1980, 90년대까지도 KAIST나 포스텍(포항공대)에 대한 지원조차 형편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연구재단의 예산만 하더라도 2조6000억 원이 넘고, 이명박 정부는 앞으로 2012년까지 국내총생산(GDP) 대비 5%까지 연구지원을 늘릴 예정입니다. 이 정도면 세계 톱 수준입니다. 문제는 재원의 효율적 활용입니다.”
박 이사장은 한국연구재단의 핵심 과제로 국민의 세금인 예산의 효율적 활용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이사장에 취임하면서 모든 직원에게 ‘5E’를 강조했습니다. 탁월성(Excellence) 형평성(Equity) 효율성(Efficiency) 전문성(Expertise) 소통(Exchange)입니다. 연구비 지원도 이 같은 대원칙 아래 철저히 연구자의 능력 중심으로 이뤄지도록 할 것입니다. 예전처럼 정치권의 압력에 의한 지원이나 지역이나 학교에 따른 기계적인 배분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려면 연구 발굴부터 지원 등 전 과정에 참여하는 ‘프로젝트 관리자(PM)’가 각 분야의 최고 권위자여야 합니다. 현재 일부 본부장급 PM을 선발하기 위해 공모를 마쳤지만 더 유능한 분을 모시기 위해 재공모할 계획입니다. 적합한 인물을 찾으면 제가 직접 삼고초려할 생각입니다.”
―연구 분야가 방대할 텐데 소수의 PM이 다 관리할 수 있을까요.
“본부장이나 센터장 등 상근 PM은 20명이지만 이들을 돕는 비상근 전문위원이 270여 명에 이릅니다. 각 분야의 전문성을 확보한 전문위원들이 PM의 연구과제 선정을 지원하게 되는 것이죠. 결국 따지고 보면 PM은 20명이 아니라 290명입니다. 다만 상근 PM 20명이 한국연구재단의 전문 인력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학술, 연구 등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노벨상 얘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재단의 책임이 무겁습니다. 노벨상 수상 가능성이 있는 학자들을 찾아내 지원해야 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노벨상 수상을 위해서는 먼저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가 정착돼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연구 결과가 제대로 나오지 않으면 실패라고 낙인찍고 더는 지원하지 않습니다. 큰 잘못입니다. 실패 없는 성공은 없죠. 실패를 분석해 성공에 이르도록 도와야 합니다. 한국연구재단은 창의적 도전적 연구에 최고 5년, 최대 5억 원까지 지원하는 것을 제도화했습니다. 고위험(High-risk)을 무릅쓰고 지원한 연구가 결국 고성과(High-return)로 이어질 것입니다. 반드시 성공하는 것만 연구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사회가 학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성급함과 조급함을 빼야 노벨상도 탈 수 있습니다. 빨리 타고 싶다고 타는 것이 아니니까요.”
박 이사장은 한국연구재단이 새로운 모습을 보이면 우리나라를 떠난 석학들이 다시 돌아올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외국으로 떠난 유능한 학자는 대부분 국내 연구지원 기관에 대한 불신이 강합니다. 전문성이 부족할뿐더러 정치적 논리나 학연 등에 따라 지원을 결정하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죠. 포스텍 교수 시절 제 연구를 평가한 당시 한국과학재단 관계자들이 연구 내용은 잘 모른 채 엉뚱한 질문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런 상황에 부닥치면 학자들은 자존심이 상합니다. 한국연구재단은 앞으로 학자들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재단이 학자들의 연구에 효율적이고 공정한 지원을 하고 있다는 평가가 확산되면 외국으로 나간 석학들도 반드시 돌아올 것입니다.”
―지원이 과학 쪽에 치중되는 것이 아니냐는 인문사회 분야 학자들의 우려가 있습니다.
“이공계 학자들은 재단의 실질적인 업무를 총괄하는 사무총장이 인문사회 분야 출신이어서 인문사회 분야로 지원이 치중되는 것 아니냐고 오히려 걱정합니다. 양쪽 모두의 우려가 기우가 되도록 할 것입니다. 한국학술진흥재단에서는 인문 사회 복합 등 세 갈래로 지원해 왔는데 한국연구재단은 인문사회연구본부 아래 어문학단 역사철학단 법정상경단 사회과학단 문화융복합단 등 5개 분야로 세분해 다양한 지원을 할 수 있게 했습니다.”
―한국연구재단의 수장으로서 학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연구과정에서 윤리에 대한 생각을 스스로 다잡았으면 좋겠습니다. 연구 결과야 어찌되든 정부 돈이니까 무조건 많이 받고 보자는 식의 태도나 국가 발전은 안중에 없고 개인의 영욕만 좇는 태도는 곤란합니다. 연구자들이 확고한 윤리의식을 바탕으로 창조적인 도전정신을 발현하길 기대합니다.”
김기용 기자 kky@donga.com
? 박찬모 이사장
―1954년 경기고 졸업
―1958년 서울대 화학공학과 졸업
―1968년 미국 메릴랜드대 박사
―1973∼1976년 한국과학기술원 부교수
―1976∼1979년 미국 국립생의학연구소 책임연구원
―1979∼1989년 미국가톨릭대 교수
―1990∼2003년 포스텍(포항공대) 교수
―2003∼2007년 포스텍 제4대 총장
―2008∼2009년 이명박 대통령 과학기술특별보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