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9시 20분, 서울 D고등학교 2학년 교실. 야간자율학습(이하 ‘야자’) 2교시가 한창이다. 적막하던 교실에서 돌연 한 학생이 “하나!” 하고 낮은 목소리로 외치며 일어섰다가 앉았다. 이게 웬일? 곧이어 뒤쪽에 앉은 또 다른 학생이 “둘!” 하며 섰다 앉았다. 2∼3초 뒤, 이번엔 “셋!”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뿔싸! 이번엔 공교롭게도 학생 두 명이 동시에 숫자를 외친 것이었다. 숫자를 동시에 외치면 벌칙을 받는 게임이었다. 벌칙을 받게 된 학생 둘은 조용히 복도로 나가 복도 끝까지 달려갔다 오는 벌칙을 수행했다. 학생들이 키득키득 웃었다.
‘눈치게임’이라고 학생들이 이름붙인 이 게임은 감독교사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감행된다. 숫자를 세며 일어나거나 벌칙을 수행하려 복도를 질주하다 때마침 감독교사에게 발각되면 ‘재앙’을 맞기도 하지만, 야자에 지친 학생들에겐 ‘꿀맛’ 같은 순간이다.
많은 일반계고 학생들이 방과 후 야자에 참여한다.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도, 아닌 학생도 있다. 하지만 ‘자기는 공부를 안 하더라도 다른 학생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철칙이 야자엔 있다. 야자시간, 학교에선 어떤 일이 벌어질까?
늘 피곤한 학생들에게 저녁식사는 ‘수면제’와 다름없다. 양껏 저녁을 먹은 학생들은 대략 오후 6시 40분부터 시작되는 야자 1교시가 되면 기운이 다 빠진다.
이 학교 2학년 박모 군(16)은 “오후 7시 반부터 8시 반 사이가 되면 한 반 30명 중 20명 정도가 졸거나 아예 잔다”고 전했다. 잠든 사이 감독교사에게 등짝을 ‘퍽’ 소리 나게 맞는 경우는 부지기수. 너무 깊은 잠에 빠진 나머지 잠꼬대를 하기도 한다.
“시험기간이 다가오면 가끔 ‘단어 외워야하는데…’ ‘어, 학원 갈 시간인데…’라는 잠꼬대도 들을 수 있어요.”(박 군)
휴대용멀티미디어플레이어(PMP)로 인터넷 강의를 듣는 척하면서 TV 오락프로그램인 ‘1박2일’이나 ‘무릎팍도사’를 다운받아 보는 학생도 있다. PMP에 연결된 이어폰이 실수로 뽑혀 MC 강호동의 목소리가 교실 내에 울려 퍼지는 바람에 감독교사의 ‘응징’을 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특히 여학생들의 경우 오후 10시가 좀 넘어서 갑자기 동시에 “푸훗!” 하고 웃음을 참지 못한다면 필시 인기 아이돌 그룹 ‘슈퍼주니어’가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을 듣고 있다는 증거다.
경기도의 한 고교는 1학년 전체학생을 섞은 뒤 다시 10개의 ‘야자반’으로 나눴다. 낯선 학생들끼리 야자반을 편성함으로써 떠드는 분위기를 사전 차단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적막함이 흐르는 조용한 분위기는 몇 주 못 가서 무너진다. 남녀공학인 이 학교 1학년 김모 군(15)은 “딱 2주가 지나면 친해진다”면서 “얼굴을 익히면서 ‘야자 커플’이 탄생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야자 커플은 야자 1교시가 끝나자마자 1층 매점에서 만나 학교 건물 뒤를 산책하거나 벤치에 앉아 사랑을 속삭인다. “겨우 20분인 쉬는 시간에도 ‘연애질’이냐”는 친구들의 질투성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김 군은 “여고와 남고가 마주보고 있는 경우는 야자 쉬는 시간에 거울에 빛을 반사시켜서 상대편 학교에 신호를 보내기도 한다”면서 “시험이 끝나면 단체로 ‘반팅’(반 미팅)도 한다”고 전했다.
고2 서모 양(15·서울 양천구 목동)은 지난주 야자를 ‘당당히’ 빠지고 영화 ‘트랜스포머 2’를 봤다. 담임교사에게 받은 이른바 ‘야자쿠폰’을 사용한 것. 한 반에 매달 4장이 배정되는 이 쿠폰은 성적이 오르거나 수업태도가 매우 좋은 학생에게 지급되는 일종의 ‘포상휴가증’이다. 서 양은 “피곤하거나 공부가 안 될 때 야자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공식적 통로”라고 말했다.
봉아름 기자 er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