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암 위험 흡연여성이 더 높고…
60세이전 고혈압 남성이 많고…
약물효과 여성이 빠르고… 왜?
《평소 적은 양의 아스피린을 꾸준히 복용하면 심장마비를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남성과 여성이 똑같은 예방 효과를 볼 수 있을까. 1980, 90년대 미국 하버드대 의대와 국립보건원에서 이루어진 연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했다. 하버드대 의대 연구팀은 2만2071명의 중년 남성에게 이틀에 한 번씩 소량의 아스피린을 복용하도록 한 결과 심장마비가 44%나 줄어든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국립보건원이 3만9876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수행한 아스피린 예방 효과 연구에서는 결과가 사뭇 달랐다. 심장마비 위험은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다만 뇌졸중에 걸릴 위험이 약간 낮아졌을 뿐이다.》
‘생식기관 빼면 남녀 같은 몸’ 근대의학은 틀렸다
‘같은 질병도 원인-증세-치료 등 차이’ 性인지 의학 시대로
남성과 여성은 다르다. 남성과 여성의 신체적 구조의 차이로 질병에 노출되는 위험도가 다르다. 당연히 치료방법도 달라야 한다. 현대의학에서 성 차이를 반영한 ‘성인지 의학(Gender Specific Medicine)’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0여 년밖에 되지 않았다. 오랫동안 의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표준형은 ‘70kg의 성인 백인 남성’이었다. 여성은 생식과 관련된 유방, 자궁, 질을 제외하면 남성과 다를 것 없다는 것이 17세기 근대 해부학이 시작된 이후 의학 전 영역에서 받아들여진 기본 전제였다.
그러나 여성과 남성은 자신만의 독특한 생리적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각종 감염증과 늙으면서 나타나는 퇴행성 질환 등에서 미처 생각지 못했던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담낭염은 여성이 잘 걸리고 췌장암은 남성이 잘 걸린다. 심장 발작 때 가슴에 느끼는 통증의 양상도 남성과 여성은 크게 다르다. 흔히 남성은 ‘가슴이 쥐어짜는 듯 아프다’ ‘숨이 가쁘다’고 통증을 호소한다. 여성은 ‘등이 아프다’ ‘배 위쪽이 아프다’ ‘토할 것 같다’고 호소한다. 이 때문에 심장 발작을 일으킨 여성은 ‘화병’으로 진단 받고 적절한 치료 시기를 놓쳐버리기도 한다.
담배로 인한 폐암은 남성이 여성보다 더 많이 걸린다. 그러나 담배로 인한 폐암 위험은 남성보다 여성이 더 높다. 여성은 남성보다 폐암 경고 신호가 훨씬 늦게 나타나고 담배의 발암물질을 중화시키는 능력이 남성에 비해 떨어지기 때문이다.
미숙아로 태어나 살아남는 확률은 남자아기와 여자아기 중에 누가 더 높을까. 여성호르몬을 가진 여자아기다.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이 피부성장을 촉진해 외부 자극에 대한 저항을 키워주기 때문이다. 고혈압은 60세 전까지 남성에게서 더 많고 이후에는 여성에게 더 많이 발생한다.
약물 대사에서도 여성과 남성은 차이를 보인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위산 분비량이 적고 배출 속도가 느리다. 따라서 같은 약물을 복용하더라도 여성의 경우 약물이 위에 머무르는 시간이 더 길다. 약물의 효과가 더 커질 수 있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치료약의 복용법과 용량은 남성과 여성이 달라야 한다.
질병에 노출될 위험과 치료 방법에 남성과 여성 사이에 존재하는 성 차이를 인식하고 이를 활용해 효율적으로 질병을 치료하는 성인지 의학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세계 의학계에서 일어난 조류 중 가장 신선하고 새로운 조류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반영한 진단법이나 치료법이 상용화되려면 아직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성인지 의학이 미국 등 선진국에서보다 덜 알려져 있다. 지난해 2월 이화여대 의대가 설립한 ‘성인지 임상시험센터’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성별 차이를 연구하는 임상시험센터이다. 최근 심장내과 관련 학회를 중심으로 성인지 의학에 대한 논의가 점차 활발해지고 있다. 과연 병을 앓고 치료하는 데 있어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무엇인지 자세히 알아보자.
김현지 기자 nu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