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너무 놀라지 마라’에서 물 만난 물고기 같은 연기를 펼치고 있는 배우 김영필 씨. 전영한 기자
‘너무 놀라지 마라’ 능청연기 김영필 씨
가출한 아내가 친구의 빈소에서 소복을 입고 우는 모습에 충격을 받고 화장실에서 목매 자살한 아버지. 그 시신을 거둘 생각조차 않고 자기연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가족들. 영화 찍는다는 핑계로 가장의 책임을 방기하는 맏아들, 그런 남편 대신 가족의 생계를 꾸려 간다며 외간 남자를 집으로 끌어들이는 며느리, 그리고 세상이 무서워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가는 막내아들….
상반기 무대에 오른 창작연극 중 화제작으로 꼽히는 ‘너무 놀라지 마라’(박근형 작·연출)가 앙코르 공연에 들어갔다. 이 작품은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인간성의 마지막 보루이자 최후의 안식처로 신성시되는 가족주의의 환상을 통타한다. 줄거리만 보면 ‘골치 아픈 연극’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막상 작품을 보면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주체할 수 없다. 그 불편한 웃음을 끌어내는 중심에는 맏아들 역의 배우 김영필 씨(36)가 있다.
훤칠한 키에 말끔한 외모를 지닌 그는 ‘썩은 미소’와 ‘빈틈없는 이빨’만으로 자신이 직면한 비참한 상황에서 자신만 쏙 빠져나오는 ‘탈출마술’의 극치를 펼쳐 보인다. 그가 연기한 맏아들은 아버지의 주검 앞에서 “소식 듣고 많이 울었다. 이보다 더한 비극이 어느 가문에 있을까”라며 남의 빈소에 문상 갈 때 할 법한 말을 늘어놓는다. 또 아내의 외도를 뻔히 눈치채고도 그 순간을 모면하려고 “여보, 내가 당신을 의심할거란 의심 추호도 하지 마”라며 멜로드라마 속 주인공 흉내 내기에 급급하다.
지독한 이기주의자와 철없는 현실도피주의자가 겹쳐진 그의 천연덕스러운 연기는 전작 ‘경숙이 아버지, 경숙이’에서도 발휘됐다. 그는 6·25전쟁 통에 아내와 어린 딸을 버려두고 혼자 피란을 떠나면서 “너희는 둘! 낸 쏠로! 진정 외로운 사람은 내다”라는 괴변을 토해내는 경숙이 아버지 역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실제 제 속에 그런 모습이 숨어 있어요. (박)근형이 형은 항상 배우를 염두에 두고 극을 쓰는데 이번에도 그런 제 모습을 극중 인물에 투영했기에 제가 물 만난 물고기처럼 놀 수 있었던 이유 아닐까요.”
그는 그런 점에서 배역이 바뀔 때마다 완벽하게 변신을 거듭하는 로버트 드니로형(型)보다는 어떤 배역이든 자기 스타일로 소화해내는 알 파치노형 배우에 가깝다.
그는 대기만성형 배우이기도 하다. 고교 2학년 때부터 대전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던 그가 서울로 올라와 박근형 씨가 이끄는 극단 골목길에 입단한 게 31세 때다. 그나마도 낯을 많이 가리는 내성적 성격 탓에 몇 개월 뒤 다시 대전으로 내려가 막노동을 하면서 1년 2개월 공백기를 보내다 다시 올라왔다. 그런 그에게 바로 ‘청춘예찬’의 주역을 맡긴 박 씨의 안목도 감탄할 만하다.
179cm의 큰 키에 매력적 목소리, 속내를 알 수 없는 눈빛을 지닌 그는 영화계가 주목하는 배우로도 급부상하고 있다. “연기 외엔 취미도 없다”는 그의 잠재력을 다시 확인하게 될 이번 무대는 26일까지 서울 마포구 서교동 산울림소극장(02-334-5915)에서 이어진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