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락같은 사랑을 꿈꾼다면…
넘쳐나는 시간도 뾰족한 계획도 없지만 문득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 가장 어울리는 탈것은 무엇일까. 비행기와 자동차와 기차 중 고르라면, 기차를 꼽고 싶다. 비행기에서는 여행자와 공간 사이의 친밀한 관계가 사라지고, 버스에서는 다른 칸으로 이동할 수 있는 신체적 자유가 없다. 기차 안에선 괜스레 어슬렁거릴 수도 있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쓸 수도 있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처럼 낯선 남녀가 수줍은 대화를 나누다가 벼락처럼 사랑에 빠질 수도 있는 곳. 목적지까지 가야 한다는 강박을 잊고 순간의 우연에 몸을 맡겨 도중에 덜컥 내려버릴 수도 있는 것. 그것이 기차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제시는 기차에서 처음 만난 여자와 나눈 대화가 인생을 바꿔놓을 것만 같은 예감에 사로잡힌다. 그는 빈에서 내려야 하지만 차마 혼자 내릴 수 없다. “정신 나간 생각이지만, 말 안 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 계속 얘기하고 싶어. 네 사정은 모르지만 우린 뭔가 통하는 것 같아.” 서로 이름도 모른 채 각자 소중한 비밀을 이미 털어놓은 두 사람은 무작정 빈에 내린다. 옛 애인에게 차인 제시와 비행기가 무서워 기차를 탄 셀린은 이 기차에서 만나 평생 잊지 못할 무박 2일을 보낸다. 해가 떠오르기 전까지, 생의 모든 에너지를 퍼 올려 사랑해야 한다. 동이 트면 기약 없이 헤어져야 하므로. 수십 년간 똑같이 떠오르던 태양은 그날만은 다르게 뜬다. 누구도 계획하지 않은 이 시간의 경이로움을 셀린은 이렇게 표현한다. “정말 이상해. 이 시간을 우리가 만들어낸 것 같아.” 그들은 처음으로, 멀어져 가는 시간의 뒷모습이 아니라 그들이 창조해낸 시간의 앞모습을 바라보며 환희를 느낀다.
나에게 ‘비포 선라이즈’처럼 달콤했던 기차의 기억은 옛 신촌역에서 타던 완행열차였다.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은, 오직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천국에 다녀온 느낌이었다. 도착지의 목적과 출발지의 계획이 깡그리 망각되는, 기차 여행의 몽환성을 나는 완행열차를 통해 느꼈다. 일상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 그곳은 특정장소가 아니라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속하고 싶지 않은, 자아의 일시적 소멸 상태가 아닐까. 나다운 가면을 잠시나마 벗어버릴 수 있는 공간. 기차의 리듬에 몸을 싣고 넘실거리는 동안 우리는 존재의 찰나성에 눈을 뜬다. 잠시도 지도 위의 한 점에 머무르지 않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존재의 숨 가쁜 우연성을. 기차에 몸을 싣는 순간, 우리는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지만 모든 곳에 존재하는 느낌에 행복해진다.
정여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