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58세 때 데뷔작이자 자전적 소설인 ‘아빠가 결혼했다’를 펴낸 소설가 마리나 레비츠카. 아버지의 재혼을 둘러싼 소동을 유쾌하고 생동감 있게 그려냈다. 사진 제공 을유문화사
◇아빠가 결혼했다/마리나 레비츠카 지음·노진선 옮김/416쪽·1만 원·을유문화사
“엄마가 돌아가신 지 2년째 되던 해, 아버지는 매력적인 금발의 우크라이나 이혼녀와 사랑에 빠졌다. 아버지의 나이는 여든넷, 그 여자의 나이는 서른여섯이었다. 그녀는 깃털 달린 핑크색 수류탄처럼 우리 가족의 삶을 폭파시켜버렸다.”
여든이 넘은 아버지에게서 전화로 전해 듣게 된 재혼 소식에 영국 케임브리지대 사회학 강사인 나데즈다는 머리로 피가 몰린다. “제발 농담이기를!” “어리석은 노인네 같으니!” 등 비난이 튀어나오는 걸 꾹 참고 일단은 태연히 “어머나, 잘됐네요, 아버지”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재혼 상대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눈앞이 캄캄해진다. 아들이 하나 딸린 우크라이나 여자로, 발렌티나란 원래 이름보다는 비너스란 별칭이 더 어울릴 정도로 아름답다고 한다. 비단결 같은 금발에 우월한 가슴을 가졌다는 설명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애써 참으며 질문을 던진다.
“그 여자가 왜 아버지와 결혼하려고 하는지 생각해본 적 있으세요?”
아버지는 시무룩하면서도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당연히 나도 알고 있지. 여권, 비자, 취업허가증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냐. 그게 어때서?”
이 소설은 우크라이나 출신의 영국 이민자 가정에서 아버지의 재혼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소동을 유쾌하게 그려냈다.
영국에 정착하려는 한 젊은 우크라이나 여자에게 이용당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개의치 않는 ‘분별력 부족한’ 아버지, 그로 인해 경악하게 된 영악하고 현실적인 두 딸의 고군분투가 유머 있게 녹아들었다.
“짙은 화장-요란한 손톱-큰 가슴 비단결 금발의 36세 이혼녀가 84세 아빠와 결혼한다고? 왜?”
아버지는 얼마 되지도 않는 연금으로 발렌티나의 출입국 비용을 대준다. 그녀의 아들은 물론이고 서유럽의 고급스러운 생활방식을 체험하고 싶다는 여동생까지 집에 거둬들인다. 발렌티나가 원하는 자동차, 가전제품을 사들이고 심지어 가슴 수술비도 대신 지불한다. 그는 엄청나게 늘어나는 국제전화 비용을 대기 위해 출가한 딸들에게 돈을 빌리기 시작한다.
두 딸은 짙게 화장하고 요란한 손톱에, 큰 가슴을 가진 이 무례한 우크라이나 여자를 영국 이민국이 빨리 내쫓아주길 기다리지만 세상이 과거보다 이민자들에게 훨씬 관대해졌다는 것만 깨닫는다.
직접 나서야겠다는 생각에 탐탁지 않은 새어머니를 몇 번 만나보지만 발렌티나는 짧은 영어로도 당당하게 말할 뿐이다. “너 엄마 죽었어. 이제 너 아빠 나와 결혼했어. 너 그거 싫어해? 그래서 말썽부려. 나 알아. 나 바보 아냐.”
이런 와중에 발렌티나의 체류 허가가 번번이 거부되고 그녀가 누구의 아이인지 알 수 없는 아이를 임신하면서 등장인물 간의 갈등이 고조된다.
가치관의 차이를 극복하기 힘든 아버지와 딸,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두 자매 나데즈다와 베라, 서로 다른 목적으로 결혼에 합의한 아버지와 발렌티나, 결코 상대에게 호의적일 수 없는 두 딸과 새어머니 발렌티나…. 이들의 뒤엉킨 관계를 통해 작가는 노년의 고독과 이민자들의 현실, 베일에 가려졌던 한 가족의 역사와 화해를 솜씨 좋게 그려냈다.
우크라이나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영국 작가가 2005년 자전적 경험을 반영해 58세에 발표한 데뷔작이다. 원제는 작품 속에서 아버지가 틈틈이 집필하는 책의 제목이기도 한 ‘우크라이나어로 쓴 트랙터의 짧은 역사(A short history of tractors in Ukrainian)’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