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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경영]예술+상품+자본… 끝없는 뉴욕의 진화

입력 | 2009-07-18 03:00:00


◇세계의 크리에이티브 공장, 뉴욕/엘리자베스 커리드 지음·최지아 옮김/376쪽·1만2000원·쌤앤파커스

깊은 밤, 뉴욕의 젊은이들은 마치 게릴라처럼 경찰의 눈을 피해 지하로 스며들었다. 이튿날 아침이면 이들이 그린 그래피티(스프레이 페인트로 낙서처럼 그리는 그림)로 도배된 지하철이 도심을 질주했다.

장미셸 바스키아는 그래피티 그룹 ‘세이모’의 멤버이자 뉴욕 이스트 빌리지의 한 다운타운 클럽의 디제이(DJ)였다. 누가 봐도 뒷골목 반항아에 불과했던 그는 세이모가 생긴 지 4년 만인 1981년 세계적 미술전문지 ‘아트 포럼’이 미술계의 기린아로 소개했다. 바스키아는 당시 무명이던 팝 가수 마돈나와 데이트를 즐겼고 현대미술의 살아 있는 신화 앤디 워홀과 공동 작업을 했다. 그는 1988년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27세에 세상을 떠났으나 포스트모더니즘과 신표현주의의 아티스트로 평가받는다. 그의 작품은 엄청난 금액을 호가한다. 바스키아의 극적인 삶은 뉴욕이 세계 크리에이티브 산업의 중심지였기에 가능했다.

도시계획 학자인 저자에게 뉴욕은 예술과 상품과 자본이 결합해 동물적 진화를 하는 곳이다. 그래피티와 힙합 등 문화가 상품으로 만들어지는 메커니즘을 분석하기 위해 뉴욕에 돋보기를 갖다댔다.

음악 미술 영화 광고 패션 디자인 같은 창조적인 산업이 뉴욕에서 번성한 데는 지리적 조건을 빼놓을 수 없다. 뉴욕의 아티스트, 뮤지션, 패션 디자이너와 클럽, 미술관, 록 콘서트장은 맨해튼 브루클린 등 25제곱마일(약 65km²·서울 서초구와 동작구를 합친 크기 정도) 남짓한 공간에 모여 있다. 미술, 영화, 음악, 디자인은 서로 독립된 영역에 존재하기보다 서로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아이디어와 자원을 주고받는다. 어디든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라는 점은 예술적 재능을 가진 사람과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 간의 소통을 원활하게 한다. 자동차로 다닐 수밖에 없는 로스앤젤레스와 비교하면 매우 유리한 조건이다.

허영의 소산으로 보일 수도 있는 사교활동은 문화·예술 산업에서는 의미 있는 ‘생산 과정’이다.

음악 - 미술 - 영화 - 광고 - 패션 등 창조적 산업 번성의 이유 분석
“클럽서 정보 공유하는 등 사교활동도 소통의 과정”

업계에서 주최하는 파티나 신상품 시판 기념행사, 패션쇼에 참석하는 것은 문화산업 참여자들에게는 삶의 수단이자 목적이다. 클럽에서 새벽까지 춤추며 노는 일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런 활동은 문화와 경제를 이어주는 연결 고리(커넥터) 역할을 한다. 수많은 참여자가 사교활동을 통해 아이디어와 일자리를 얻는다. 늦은 밤 ‘방갈로8’과 같은 뉴욕의 클럽에서는 비즈니스 거래가 심심치 않게 이뤄진다.

사교활동은 수십 년간 뉴욕이 창조적인 도시로 자리매김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사교활동을 적절히 활용한 예술가가 앤디 워홀이었다. 그는 ‘팩토리’라고 불렀던 자신의 작업장을 문화 생산과 사교의 장으로 통합했다. 나아가 팩토리가 지닌 명성을 통해 새로운 경제적 가치도 만들어 냈다.

이 책은 뉴욕이란 공간에 국한하지 않고 문화 산업의 경향에 대해서도 분석했다. 저자는 최근 문화상품의 가치를 판단할 때 평론가나 잡지 에디터 외에 ‘동료 평가(peer review)’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고 말한다. 창조적인 산업에 종사하는 유명인들의 관심이나 말이 곧 상업화로 이어진다. 패션 디자이너인 마크 제이컵스의 패션쇼에 초청된 신예 밴드가 명성을 얻고 팝 스타이자 영화배우인 제시카 심슨이 입은 청바지를 사러 백화점에 간다는 것.

저자는 문화적 맥락을 만드는 자가 가치를 선점하면서 부를 거머쥐는 시대를 맞고 있는 사례로 디자인스쿨 학생이었던 셰퍼드 페어리를 들었다. 그는 1989년 친구와의 농담을 계기로 ‘앙드레 더 자이언트(프랑스 거인 프로레슬러)를 따르라’는 스티커를 만들어 도심 곳곳에 붙였다. 익명으로 무언가를 마음껏 세상에 표출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장난 삼아 시작한 스티커 붙이기는 펑크족 등의 도움을 받아 확산됐다. 이후 반전의 메시지를 담은 선전 문구를 통해 더 많은 추종자를 확보했고 세계적인 현상으로 발전했다. 그는 이런 활동 덕분에 의류 브랜드를 만들 수 있었고, 세계 갤러리에 디자인 작품을 전시할 수 있었다.

책의 뒷부분에 뉴욕의 인물, 장소, 브랜드, 밴드·클럽 등을 열거한 ‘뉴욕사전’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비슷한 맥락을 지닌 이야기들이 있는 데다 뉴욕의 지도가 곁들여지지 않은 점은 아쉽다. 원제는 ‘The Warhol Economy’(2007년).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