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사기. 동아일보 자료사진
나일론. 동아일보 자료사진
스카치테이프. 동아일보 자료사진
경기 침체기에는 전반적으로 소비가 감소하는 게 상식. 그러나 역사를 되돌아보면 불경기를 비웃기라도 하듯 히트 치는 상품들도 적지 않다.
미국 휴대전화 및 신용카드정보 비교 업체 '빌슈링크닷컴'(BillShrink.com)은 1920~1930년대와 1980년대 초반의 세계적 불황기에 매출이 크게 오른 제품과 서비스를 소개하며 "이들 제품을 연구하면 불황에 대한 대처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슈퍼마켓
과거에는 슈퍼마켓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가게에 가서 필요한 물건을 얘기하면 카운터의 종업원이 물건을 찾아주고 그 자리에서 계산하는 방식이었다. 지금의 슈퍼마켓 판매방식을 처음 사용한 곳은 1916년 멤피스에서 문을 연 '클리어런스 선더스'(Clarence Saunders). 손님에게 물건을 찾게 하고 종업원을 줄인 만큼 값을 깎아주는 독특한 판매방식으로 눈길을 끌었다.
정작 선더스가 본격적으로 주목 받기 시작한 것은 대공황이 시작되면서부터였다. 지갑이 얇아진 소비자들은 한 푼이라도 싸게 사기 위해 선더스를 찾았고 '세이프웨이'와 같은 대형 유통업체들도 선더스의 슈퍼마켓 방식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냉장고
제너럴 일렉트릭의 히트상품이었던 냉장고는 대공황 기간인 1929년부터 1933년 사이에 판매량이 30% 증가했다.
남들보다 먼저 집에 냉장고를 들여 놓으려는 욕구가 불황 속에서도 여전히 높았던 데다 상해서 버리는 음식을 줄이는 게 장기적으로 절약하는 길이라는 인식이 냉장고 판매량 증가에 기여했다는 해석.
전문가들은 "기술 혁신을 통한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는 불황도 막을 수 없다"고 설명한다.
b>●스카치테이프
3M사의 스카치테이프는 대공황이 본격화한 1930년에 시판됐다. 스카치테이프를 발명한 3M의 리처드 듀 연구원은 자동차 도색 작업을 하는 기술자들이 색을 칠할 부분을 구분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보고 스카치테이프를 고안했다.
하지만 정작 스카치테이프를 애용한 곳은 따로 있었다는 게 3M 측의 설명. 남은 야채나 빵 등을 밀봉하면 보존 기간을 늘릴 수 있어 쓰레기를 줄이려는 식료품점과 빵집을 중심으로 스카치테이프의 수요가 늘었다는 것이다.
●나일론
스카치테이프와 마찬가지로 나일론도 불황기에 시장에 나왔다. 듀퐁사는 1935년 나일론을 개발해 1939년 제품을 판매하자마자 대박을 쳤다. 값이 싸고 품질이 좋아 실크를 대신할 소재로 각광을 받았으며 특히 양말 바지 등의 옷 재료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하지만 '불황의 압박'이 없었더라면 나일론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해석. 나일론은 듀퐁사의 경영진이 교체된 뒤 개발됐다. 기존 경영진은 이윤보다는 학술적인 연구개발을 강조했으나 새로 바뀐 경영진이 "돈 되는 개발"을 강조하면서 나일론 개발에 속도가 붙었다는 것이다.
●복사기
복사기를 발명한 사람은 미국의 체스터 칼슨. 대공황 속에서 거듭되는 해고로 회사를 옮겨다녀야 했던 그는, 당시 한 중소기업에서 똑 같은 문서를 여러 장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종이에 손으로 글씨와 도표 등을 똑같은 쓰고 그리는 일에 싫증이 난 그는 정전기와 빛을 이용해 문서를 똑 같이 만드는 기계를 1938년 개발했다. 1942년에는 관련 기술 특허를 얻었다.
그의 기술을 산 할로이드사는 회사명을 '제록스'로 바꾸고 1959년 제품을 시장에 내놔 대박을 쳤다. 인건비를 줄이고 능률을 높이려는 기업들 사이에서 복사기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만약 칼슨이 안정된 직장에서 아쉬움 없이 생활했더라면 그 이후로도 상당기간 복사기는 없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트윈키
미국인들이 즐겨 먹는 트윈키라는 일종의 소형 케이크. 주유소, 편의점, 소매점 등 미국 전역에서 구입할 수 있는 이 제품은 1930년 지미 뉴어가 개발했다.
컨티넨탈 제과 업체에 근무하던 듀어는 소형 딸기 케이크 제작 장비를 바나나로 속을 채운 소형 케이크를 만드는 데 활용해 제품을 만들어냈다.
당시 한 팩에 5센트를 받고 팔았으며, 돈이 궁해 트윈키로 식사를 대신하는 소비자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현재도 미국에서는 연간 5억 개의 트윈키가 팔리고 있다.
●모노폴리 게임
국내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브루마블'의 원조격인 모노폴리 게임도 1935년 불황 속에서 탄생했다. 이 게임을 개발한 찰스 B 다로우는 완구 제조업체 파커 브라더스에 생산을 제안했다가 퇴자를 맞았다. 결국 그는 자신이 직접 게임을 만들어 소량으로 판매하기 시작했다. 적은 양이지만 자신이 투자를 해서 돈을 번다는 데서 대리 만족을 느낀 소비자들 사이에서 게임이 인기를 끌자 이번에는 파커 브라더스사가 먼저 다로우에게 계약을 제안하고 대량상산에 나서 보드게임의 스테디셀러를 탄생시켰다.
●자동차용 라디오
'미국 대공황'이라는 책에 따르면 자동차용 라디오가 대중화한 것도 대공황 기간이었다.
1927년 처음 판매되기 시작한 자동차용 라디오는 공황 초기인 1930년에는 장착율이 1% 미만이었으나 1935년에는 200만대, 1940년경에는 전체 등록 자동차의 25% 가량인 700만대에 장착됐다.
당시 미국인들 사이에서 라디오는 '잠시 현실을 잊고 자유로움을 느끼게 해주는 매체'로 각광을 받았다는 것. 영화나 잡지처럼 눈에 보이는 꽉 짜여진 콘텐츠가 아니라 자유롭게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소비를 줄이는 가운데에서도 라디오 관련 지출은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성엽기자 cp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