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 수도원 수행기 펴낸 향적스님
“불교의 관세음보살이나 가톨릭의 성모마리아가 다르지 않습니다. 자비와 사랑을 말하는 점에서 모든 종교는 하나죠. 20년 전 프랑스 수도원에서 수행할 때도 그랬고, 얼마 전 수도원을 다시 찾았을 때도 이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다.”
해인사 지족암에 안주한 향적 스님(59)이 20여 년 전 프랑스 수도원에서 수행한 경험, 이에 대한 요즘의 느낌을 담아 책을 냈다. ‘프랑스 수도원의 고행’(금시조). 그는 1967년 해인사에서 출가했으며 불교신문 사장을 지냈다. 1989년부터 1993년까지 4년간 프랑스와 스위스에서 종교, 언론학 등을 공부했다. 그중 1989년부터 1990년까지의 수도원 생활이 이 책의 주요 내용이다.
그는 올해 5월 20년 만에 수도원을 다시 찾았다. 수도원은 신축과 개축으로 많이 변해 있었다. 당시에는 나이 지긋한 신부가 원장이었지만 현재는 40대가 맡고 있었다. 수사의 수도 절반으로 줄어 50명 정도였다. 그러나 평생 한곳에 기거하며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것은 그대로였다. 스님은 21일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황금만능주의 세태 속에서 바보스러울 정도로 금욕적 수행을 계속해오는 수사들을 보면서 스스로를 다시 한번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향적 스님이 처음 유럽에 간 것은 1988년 여름. 다음 해로 예정돼 있던 프랑스 가톨릭수도원 수행을 앞두고 유럽의 분위기를 익히기 위해서였다.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독일 키엘로 가기 위해 야간 기차를 탔다. 맞은편 침대칸에 금발 미녀 둘이 보였다. 잠자리에 들면서 두 사람은 옷을 벗고 팬티 차림이 됐다. 그러고는 “굿 나이트” 인사를 건네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둔기로 머리를 맞은 듯했다.
향적 스님이 가톨릭 수도원에 간 것은 유럽의 가톨릭을 직접 체험하고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머문 곳은 파리에서 차로 두 시간 거리인 부르고뉴 지방의 피에르 키 비르 수도원. 그는 전화 통화에서 “당시 답사여행에서 느낀 유럽에 대한 문화적 충격으로 수도원에 들어가기가 무서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수도원 원장이 직접 만든 가죽 슬리퍼만으로 겨울을 나는 그들의 청빈함을 보며 그곳에 감화되기 시작했다. 그는 “서양은 물질문명 사회이고 동양은 정신문명 사회라는 내 선입견이 완전히 깨졌다”며 “지금도 수사들은 20년 전과 같이 양말과 팬티를 기워 입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수도원의 종교적 개방성에 놀랐다. 책임 신부의 방에는 일본 도쿠시마(德島) 시 간논(觀音)사의 관세음보살 벽화가 있었다. 그는 “우리나라의 천주교단이나 기독교단에서는 볼 수 없는 일”이라며 “아시아 종교를 연구하는 모임에서는 불교의 ‘법화경’을 공부하면서 하나같이 관세음보살의 자비와 성모마리아의 사랑이 같다고 이야기하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1년 남짓한 수도원 생활을 끝내는 환송회에서 그는 우리 가곡 ‘떠나가는 배’를 불렀고 ‘회자정리 생자필멸(會者定離 生者必滅·만남에는 반드시 이별이 있고,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이란 말을 남겼다. 그 내용을 프랑스어로 번역해 주자 수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스님은 “우리 사찰은 신도들의 시주에만 의존해 무위도식하는 격”이라며 “프랑스에서 가톨릭의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지만 여전히 옷 음식 등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