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금횡령도주 前부장 집앞서
“혹시나 들르면 잡으려고…”
휴가도 못가고 2교대 감시
목을 길게 빼고 지나가는 사람을 일일이 훔쳐봤다. 행인이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자 어색하게 뒷짐을 지고 먼 하늘을 바라봤다. 1995년 동아건설에 입사해 토목공사 현장관리를 하는 권모 과장(36)은 난생처음 ‘사설탐정’이 돼 잠복근무 중이다. 회사에서 차출돼 잠복근무를 한 게 이번이 세 번째였다. 21일 새벽 서울 송파구 풍납동에서 한눈 한번 팔지 않고 그가 노려본 곳은 10일 회사돈 890억 원을 빼돌려 달아난 동아건설 전 자금관리부장 박모 씨(48)의 집.
권 과장은 안 보는 사이 박 씨가 다녀갈까봐 점심과 저녁도 집이 잘 보이는 식당에서 때웠다. 눈은 박 씨의 집을 향한 채 숟가락질을 해 허기를 채웠다. 권 과장은 입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외환위기를 겪었고 이어진 회사 파산의 아픔도 참아냈다. “지금은 300명 남짓 남았지만 회사가 파산하기 전에는 직원이 6000명에 달했어요. 토목 분야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고요.” 2001년 파산한 동아건설은 지난해 3월 프라임그룹에 인수됐다. “올해 건설경기가 아무리 어렵다지만 이미 온갖 고생으로 단련된 우리 직원들은 이런 불황조차 기회로 볼 정도로 달관했죠.”
“1만 원짜리로 바꾸면 방 하나는 채울라나? 이런 상황에 890억 원이나 되는 큰돈을 빼돌려 달아났다니…. 도박으로 날리고 자금세탁을 해 빼돌렸을 수도 있다고 하대요.” 평생 월급쟁이로 산 권 과장에게 890억 원은 상상도 되지 않는 금액이다. 파산 때 동결된 임금은 이제 겨우 오르기 시작했다. 권 과장은 회사가 새 출발을 시작하려는 데 찬물을 끼얹은 박 씨가 야속하기만 하다.
“빨리 잡혀야 현장으로 돌아가 일을 할 수 있는데….” 목이 새카맣게 그을린 권 과장은 땀과 흙으로 뒤범벅된 작업복 차림의 현장에 가고 싶어 몸이 근질거린다고 한다. 권 과장은 줄곧 사무실에 있었던 박 씨와 잘 모르는 사이라 잠복 근무조에 뽑혔다. 권 과장과 함께 나온 동아건설 직원 두 명도 밤을 꼬박 새운 뒤에야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다. 하루 쉬고 다음 날이면 또 교대를 하러 나와야 한다.
권 과장뿐만 아니라 다른 회사 직원들도 박 씨 찾기에 나섰다. 휴가비를 모아 현상금 3억 원을 걸어 수배전단을 만들었다. 휴가도 반납하고 지하철에서, 길거리에서 전단을 뿌리고 있다.
권 과장 손에는 낯익은 설계도 대신 손바닥만 한 수첩이 들려 있다. ‘오후 6시 15분 옆집 아주머니가 빠끔히 쳐다보고 갔음.’ 수첩엔 박 씨 집 앞 상황이 깨알같이 적혀 있다. 서해대교 같은 큰 다리를 짓는 게 꿈인 권 과장이 잠복근무 대신 일터로 돌아갈 날이 언제일까.
신민기 기자 mink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