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세계국립극장 페스티벌 개막작 ‘태풍’을 연출한 쉬커(徐克) 감독은 “경극의 관점에서 셰익스피어를 이해하는 것은 균형을 잡기 어려운, 가는 현을 타는 것과 같은 작업”이라고 말했다. 사진 제공 국립극장
‘태풍’은 원작 ‘템페스트’의 주인공인 마법사 프로스페로를 신비한 동양적 주술가로 형상화했다. 프로스페로 의상을 입은 우싱궈 대만 당대전기극장 예술감독. 사진 제공 국립극장
9월 세계국립극장 페스티벌 개막작 ‘태풍’ 연출 쉬커 감독
셰익스피어의 희극 ‘템페스트’는 폭풍우를 불러일으키는 요정 에어리얼을 맘껏 부리는 마법사 프로스페로가 주인공이다. 밀라노의 영주였던 그는 마법 연구에 심취해 정무(政務)를 동생 안토니오에게 일임했다가 동생의 배신으로 권좌에서 쫓겨나 외동딸 미란다와 함께 외딴섬에 유폐된다. 연극은 안토니오가 나폴리의 왕 알론조 일행과 배를 타고 이 섬 가까이를 항해할 때 프로스페로가 폭풍우를 일으켜 이들을 섬으로 끌어들이면서 시작한다. 이 작품엔 웅장하고 환상적이란 표현이 늘 붙는다.
9월 4일 개막하는 제3회 세계국립극장 페스티벌의 개막작 ‘태풍’은 템페스트를 중국 전통의 경극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배경은 지중해에서 남중국해로 바뀌고 등장인물은 중국 경극의 전형적 캐릭터로 바뀐다. 극의 중심인물인 프로스페로는 길이 4m, 너비 5m의 붉은 망토자락을 펄럭이며 거대한 풍랑을 일으키는 보부뤄(波布羅)로 바뀐다. 그가 마법을 펼칠 때면 붉은 망토에 새겨진 황금빛 상형문자(고대 한자를 연상시킨다)가 무대 전반으로 확장되면서 빛의 춤을 펼쳐낸다. 여기에 중국 민속악기가 빚어내는 쇳소리와 어울린 경극 톤의 중국어가 17세기 유럽의 환상극에 지극히 동양적인 주술의 기운을 불어넣는다.
‘경극의 현대화’를 내세운 이 작품의 이런 시청각적 효과에는 영화감독 쉬커(徐克)의 지문이 찍혀 있다. ‘영웅본색’과 ‘천녀유혼’을 제작하고 ‘황비홍’과 ‘촉산’을 감독한 그가 생애 최초로 무대연출을 맡은 작품이다. e메일 인터뷰에서 그는 “내가 ‘태풍’의 연출을 결정한 것이 아니라 작품이 나를 선택했다”며 “나의 창작 경력에 있어 가장 가치 있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쉬 감독이 ‘태풍’의 연출을 맡은 것은 ‘태풍’에서 보부뤄 역을 맡은 우싱궈(吳興國) 예술감독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경극배우이자 연출가인 우싱궈가 1986년 창단한 당대전기극장은 맥베스와 햄릿, 리어왕 등 셰익스피어의 고전을 경극으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그가 ‘태풍’의 연출을 제안했을 때 쉬 감독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응낙했다”고 말했다.
“1993년 ‘청사’에 우싱궈를 출연시키면서 그의 팬이 됐고 그의 공연을 볼 때마다 반(半)비평가가 된 심정으로 소감을 전하곤 했는데 그가 어느 날 밤 대만에서 홍콩으로 전화를 걸어 태풍의 연출을 제안했을 때 그의 오랜 팬으로서 기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맥베스를 경극화한 ‘욕망의 제국’에서 1인 10역을 소화했던 우싱궈는 ‘태풍’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펼친다. 쉬 감독은 “우싱궈의 연기를 보면 환상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그는 영화와 달리 시공간적 제한이 큰 연극 연출을 통해 “극의 리듬의 일부가 되는 관객 반응을 염두에 두고 심리적 효과를 활용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템페스트’는 서구가 세계 식민지 개척에 나선 17세기에 탄생한 작품이다. 프로스페로가 섬의 원주민인 칼리반을 경멸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엔 식민지 주민을 향한 제국주의자의 시각이 녹아 있다. 쉬 감독은 이를 뚜렷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원작과 달리 공기의 요정 에어리얼과 원초적 땅을 상징하는 칼리반이 맺어지도록 결말을 바꿨다.
“‘템페스트’는 유머와 냉소를 통해 인류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사랑과 용서임을 말합니다. 경극 역시 그 본질엔 사랑, 열정, 도덕 등 인류가 공유할 수 있는 가치가 담겨 있습니다. ‘태풍’은 이 같은 공통점을 토대로 서구문명에 뿌리를 둔 원작의 힘을 경극이라는 무대언어로 표출한 것입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