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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최영훈]‘이 지구상에 절반의 사람…’

입력 | 2009-08-05 02:56:00


31년 전 내가 다닌 대학은 계열별로 학생을 뽑았다. 계열의 정원이 500명을 넘을 정도로 규모가 큰 편이었다. 그런데 그 많은 학생들 중 여학생은 단 한 명이었다. 당시 이 대학에선 음대나 미대를 제외하곤 여학생이 그야말로 희귀한 존재였다. 그 시절 유행했던 운동권 노래 중 하나는 ‘이 지구상에 절반의 사람…’으로 시작했다. 처음 들었을 때 으레 여성에 관한 노래이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비장한 음률의 노래 가사에선 예상과 달리 여성의 ‘여’자도 나오지 않았다.

한국여성 정치역량 세계서 102위

알고 보니 이 노래는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어루만지는 찬송가였다. 사실 여성도 과거에 억압받는 사회적 약자이긴 했다. 특히 정치 참여라는 측면에서 그랬다. 선진국 중 프랑스는 여성에게 투표권과 피선거권을 가장 늦게 준 국가로 꼽힌다. 여성에게 최초로 투표권을 부여한 리투아니아에 비해 2세기 늦은 1944년 샤를 드골 장군이 임시정부의 포고령으로 투표권을 줬다. 여권 신장으로 우리 사회의 각종 전문직에 여성의 진출이 괄목할 만큼 늘어나고 있다. 행정고시나 외무고시 합격자 수에선 이미 여성이 남성을 앞질렀다. 사법시험 여성 합격자도 40%를 넘나든다. 경찰대의 수석 졸업도 여학생이 차지한다. 전체 공무원 중 여성 비율도 40%(2008년 기준)를 넘었다. 초중고교로 내려가 보면 똑똑하고 당찬 여학생들에게 치여 주눅 든 남학생들이 숱하다. 여러 지표들은 ‘여풍(女風)’이 갈수록 더 세질 것임을 웅변한다.

그러나 정치권으로 눈을 돌려보면 아직 갈 길이 너무 멀다고 푸념하는 여성들이 많다. 유엔개발계획(UNDP)이 올해 발표한 여성권한측도(국회의원 및 전문직 여성 비율로 측정)에서 우리나라는 75개국 중 최하위권인 68위에 그쳤다. 세계경제포럼이 지난해 발표한 세계 성(性)격차지수의 여성 정치 역량강화 분야에서는 130개국 중 102위였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한 여성 수는 41명으로 전체 의석수의 13.7%였다. 12년 전에 비해선 4배 이상 증가한 것이지만 국제의원연맹(IPU) 집계로는 하위권인 84위였다.

여성의 정치 참여에서 후진적이었던 프랑스는 10년 전 정당 공천의 여성 할당제가 위헌 시비를 낳자 헌법까지 바꿨다. 프랑스에서 이제 각 정당은 의무적으로 지방의회 의원 후보의 절반을 여성으로 공천한다. 국회의원 공천에선 정당이 할당제를 지키지 않으면 벌칙으로 국고지원금을 감액하는 방식으로 운영한다. 그래서 프랑스의 국회의원 중 여성 비율은 18.2%이지만, 지방의원은 절반에 가까운 47.5%에 이른다. 우리도 2000년 30% 여성 할당제를 법제화한 데 이어 2002년 비례대표의 50%를 여성에게 할당했다. 그러나 국회의원이든 지방의원이든 지역구 의원 30% 여성 할당제는 구속력이 없는 권고 규정이라 선거 때마다 각 정당은 무시해버린다.

모성애로 ‘활극 정치’ 잠재웠으면

김정숙 한국여성단체협의회장은 최근 한국여성정치문화연구소 창립 20주년 기념 토론회에서 좌와 우를 뛰어넘는 범여성 정치네트워크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각 정당이 광역 및 기초 의원후보의 30%를 반드시 여성으로 공천하도록 만들겠다는 다짐도 했다. 그의 주장에 기자도 120% 동의한다. 단순히 양성 평등 차원에서가 아니다. 환경 교육 복지 등 생활정치에 여성은 분명히 강점이 있다. 부패와 유착으로부터도 여성 정치인은 대체로 자유롭다. 무엇보다 지방정치는 생활정치가 중심이라는 점에서 여성의 참여는 확대돼야 한다.

이 땅의 여성들이여, 제발 뭉쳐 지방의원뿐만 아니라 내친김에 지역구 국회의원까지 30% 할당제를 따내라. 그래야 해머와 공중부양으로 상징되는 난폭하고 사나운 여의도의 ‘활극 정치’도 부드럽고 생산적인 ‘모성(母性) 정치’로 서서히 진화하지 않겠나.

최영훈 편집국 부국장 tao4@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