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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도 다함께]일자리도 건강보험도 그림의 떡… 무국적자는 ‘살아있는 유령’

입력 | 2009-08-06 02:57:00


정확한 현황 파악도 안돼 인권사각지대에서 신음
정부 “연말까지 대책 마련”

“중국에 두고 온 두 아들이 너무 보고 싶어요….”

입 주위가 가늘게 떨리는가 싶더니 두 눈에 금세 눈물이 고였다. 3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의 ‘쪽방촌’에서 만난 한정순 씨(가명·57·여)는 앙상한 두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방 한쪽에선 곰팡이 냄새가 물씬 피어올랐다. 한 씨는 스스로를 ‘살아 있는 유령’이라고 불렀다. 한국에 살고 있지만 한국에서 그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한 씨의 이름으로 집이나 일자리를 얻을 수 없고 건강보험 혜택을 받거나 휴대전화를 개통할 수도 없다. 법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무국적자’이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유령’

한 씨는 가사 도우미를 하며 겨우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1998년 2월 한국 땅을 처음 밟았을 때만 해도 그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전 남편과 성격 차로 이혼한 뒤 낯선 한국에 왔지만 열심히 일해 돈을 모으면 중국에 남겨둔 두 아들을 곧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꿈은 곧 물거품이 됐다. 중국의 결혼소개업자가 생활력 강한 주방장이라고 말했던 새 남편은 정신지체 장애인이었다. 한 달을 참고 견디다 결국 집을 나왔다. 꿈을 이루기 위해 식당 종업원, 여관 청소부 등 가리지 않고 일하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하지만 2005년 갑상샘암에 걸리면서 모아놓은 돈은 모두 병원비로 날렸다.

2006년 7월. 한 씨는 비행기표를 사 들고 무작정 공항으로 갔다. 두 아들이 너무 보고 싶었다. 하지만 한 씨는 비행기에 타지 못하고 공항에서 붙잡혔다. 그곳에서 자신이 ‘국적 불명 상태’라는 말을 들었다.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은 “결혼을 주선했던 사람이 위장결혼 브로커로 구속되면서 한 씨도 위장결혼 판결을 받아 국적을 잃었다”고 했다. 국적을 잃었다는 것보다 아들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더 슬퍼 밤새 울었다. 한 씨는 20일 만에 보증금 1000만 원을 내고 풀려났지만 무국적자로 분류돼 3개월마다 법무부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에 들러 체류기간을 연장해야만 한다.

이정난 씨(가명·47·여)도 10년 넘게 무국적자로 살고 있다. 1997년 중국에서 건너와 한국 남성과 결혼했지만 이듬해 “브로커의 소개로 만난 두 사람은 실제 부부가 아니라 위장결혼으로 보인다”며 법원이 혼인무효 판결을 내렸기 때문. 남편이 공사장에서 일하며 버는 돈으로 겨우 살림을 꾸려가고 있지만 이 씨는 정식으로 일자리를 구할 수 없다. 며칠 전 계단에서 넘어져 크게 다쳤지만 건강보험 혜택을 받지 못해 병원도 가지 못한 채 이를 악물고 있다.

1992년 두만강을 건너 탈북한 뒤 중국과 몽골에 머물다 2004년 한국에 온 탈북자 김성일 씨(가명·46)도 5년째 국적이 없다. 조사과정에서 아버지가 화교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중국인 불법입국자로 분류돼 중국으로 강제 송환됐지만 중국도 ‘신원이 명확하지 않다’며 그를 돌려보냈다.

○법무부 대책 마련 착수

지난해 말 현재 국내에 머물고 있는 무국적자는 130여 명. 이들은 국제협약에 따라 무국적자 지위를 인정받은 난민이나 국적변경 절차에 따라 일시적으로 무국적 상태에 놓인 사람들이다. 따라서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아 자유롭게 외국에 나갈 수 있고 국내에서도 외국인과 동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다.

하지만 한 씨나 이 씨처럼 한국에 이미 들어온 상태에서 국적을 잃거나 처음부터 한국 국적을 얻지 못한 무국적자들은 법적으로 아무런 보호도 받을 수 없다. 법무부는 위장결혼으로 판명돼 한국 국적을 잃은 결혼이민자가 21명, 북한 사람인지 확인할 수 없어 한국 국적을 얻지 못한 탈북자가 22명인 것으로 집계하고 있지만 실제 무국적자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법무부는 5일 정인섭 서울대 법학과 교수 연구팀으로부터 ‘무국적자 관리 및 체류질서 확립을 위한 제도 연구’ 보고서를 제출받아 이를 토대로 올해 말까지 무국적자 지위를 인정하는 기준과 절차를 마련키로 했다. 국내에 체류하고 있는 무국적자의 정확한 현황도 파악할 방침이다.

법무부 관계자는 “먼저 무국적자 지위를 인정해주고 나서 원하는 국적을 회복하도록 할 계획”이라며 “장기적으로 결혼이민자에게 이중국적을 허용해 혼인무효 판결로 무국적 상태가 되지 않도록 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내에서 무국적자가 되는 사례

○한국인과 결혼해 한국 국적을 얻었지만 위장결혼 혐의가 인정돼 혼인무효 판결 을 받은 결혼이민자

○부모 중 한 명이 화교나 중국인이어서 북한 국적으로 볼 수 없는 탈북자

○해외 체류기간이 너무 길어 탈북 여부를 판별할 수 없는 탈북자

○부모와 같이 탈북했거나 탈북자가 낳은 자녀지만 해외 체류기간 중 부모를 잃 어버려 국적을 판별할 수 없는 고아

○난민 인정이 거부된 외국인 또는 이들이 한국에서 낳은 자녀

무국적자가 얻지 못하는 권리

○호적과 주민등록이 없음

○주택 임차 및 구입, 통장 개설, 휴대전화 개통 등 불가

○건강보험 혜택을 받지 못함

○해외 출입국 불가

최창봉 기자 ceric@donga.com

윤샘이나 인턴기자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4학년

석희창 인턴기자 고려대 언론학부 4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