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모 씨(36)의 가방 속에는 내시경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직업은 의사가 아니라 ‘빈집 전문털이범’이었다. 김 씨의 내시경에는 구부러진 쇠파이프 끝에 카메라 렌즈가 달렸다. 휴대전화 카메라와 연결해 촬영 버튼을 누르면 내시경으로 촬영되는 화면이 뜬다. 아파트 현관문에 달린 외시경(도어뷰) 나사를 돌려 떼어내면 지름 1cm 내시경이 쏙 들어갔다. 이 내시경에 달린 쇠고리로 아파트 현관문의 자동잠금장치 버튼을 찾아 누르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김 씨는 “작업을 시작하고 문을 여는 데는 5분이면 충분했다”고 밝혔다. 김 씨는 지난해 10월부터 최근까지 이 장비를 가지고 서울과 경기 일대 빈 아파트를 37차례 털어 모두 9000만 원 상당의 현금과 귀금속을 훔쳤다.
김 씨의 수첩에는 수도권 일대 아파트단지에 대한 정보가 암호처럼 적혀 있었다. ‘서울 강동구 둔촌동 A아파트, 1번 X, 2번 B, 3번 A.’ 1번은 이 아파트단지 입구가 차단돼 있는지(차단 O, 차단 안됨 X)를 말한다. 2번은 아파트 동 입구에 디지털 잠금장치가 있는지(A), 경비가 항상 지키고 있는지(B), 3번은 현관문 외시경의 상태가 좋은지 나쁜지 등을 뜻한다. 범행 때마다 새로 사전답사를 할 필요가 없도록 정리해 둔 것이다. 김 씨는 폐쇄회로(CC)TV가 없고 단지가 넓어 출입이 자유로운 오래된 저층 아파트를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
서울 강동경찰서는 6일 내시경이 장착된 특수장비를 이용해 빈집을 상습적으로 털어온 김 씨와 공범 윤모 씨(41)를 붙잡아 구속했다.
신민기 기자 mink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