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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상 기자의 와인 다이어리] 꿈틀꿈틀 산낙지에 와인…식객도 감탄

입력 | 2009-08-11 07:52:00


소비뇽 블랑, 산낙지 감칠맛 더해줘… 버터 냄새 매혹적인 파운더스 블록… 낙지구이의 매콤한 맛 포근히 안아 새콤한 낙지무침엔 쌀막걸리 생각이

서울 봉천동의 한 식당. 허영만 화백은 한 손으로 세발낙지 몸통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몸통과 눈 사이 공간에 나무젓가락을 집어넣었다. 이어 8개의 낙지 팔을 돌돌 나무젓가락에 감더니, 순식간에 입 속으로 털어 넣는다.

군더더기 없이 재빠르고 정확한 동작이다. 완벽한 ‘시범’을 끝낸 허 화백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주위 기자들에게 세발낙지가 담긴 냉면 그릇을 밀어준다.

얼마 전 가진 ‘밥상머리 토크’는 이렇게 시작됐다. LG상사 트윈와인이 맛의 대가 허영만 화백과 진행하는 ‘와인&안주 프로젝트’인 밥상머리 토크의 이번 주제는 낙지. 마른 소에게 주면 금세 힘을 되찾고(정약전의 ‘자산어보’), 한 마리가 인삼 한 근에 버금가는 효능이 있다(동의보감)는 최고의 강장 식품, 바로 그것이다.

낙지는 타우린, 양질의 지방산, 철분, 칼륨, 단백질, 비타민 B2, 인으로 가득한 저칼로리 스태미나 식품으로 숙취 해소 및 피로 회복에 탁월한 효과를 내고, 피부 미용과 콜레스테롤 억제에도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태미나가 달리기 쉬운 여름날 이 만한 음식이 없다. 와인과의 매치 시도가 살짝 흥분감을 불러일으킨 이유다.

산낙지에는 먼저 ‘코르테 지아라 소아베’(이탈리아)와 ‘비냐 마이포 소비뇽 블랑 리제르바’(칠레)가 나왔다. 토착 품종 가르가네가를 메인으로 샤르도네와 블렌딩한 소아베는 상큼함이 좋다. 꿈틀거리는 산낙지와 궁합이 딱이다.

산낙지는 기름장에 찍어 먹기 때문에 자칫 느끼할 수 있는데 유분감을 말끔하게 씻어내면서 기분 좋은 열대 과일 아로마로 마무리한다.

소비뇽 블랑 또한 기대했던 대로 산낙지와 제대로 된 마리아주를 만든다. 신선하고, 입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느낌은 산낙지의 감칠맛을 업그레이드한다.

소아베를 만족스럽게 넘긴 허 화백은 소비뇽 블랑이 맘에 드는지 몇 차례 더 잔을 채운다. “맛있어. 이거 잘 어울리는데”라며 흐뭇한 미소가 스르르 번진다. 좋은 산도가 만들어낸 결과에 반한 얼굴이다.

약간의 아쉬움은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혀와 입가에 기름이 더해지자 다소 비릿한 향이 번졌다. 숙성을 더한 리제르바 대신 그냥 소비뇽 블랑하고 매치했으면 이런 단점을 보완하지 않았을까.

두 번째 음식은 새콤 달콤 매콤한 삼색 매력을 지닌 낙지무침.

사실 매콤한 음식과 와인을 매치하는 일은 쉽지 않다. 거기에 새콤한 느낌까지 더해진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스파클링 와인인 ‘세규라 비우다스 브뤼 리제르바’(스페인)가 시험대에 올랐다. 결과는? 역시 만만치 않다. 한 잔을 비운 허 화백의 손은 다시 소비뇽 블랑으로 향한다.

만약 이 자리의 테마가 와인이 아니라 쌀막걸리를 내놓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걸쭉한 쌀막걸리는 새콤 달콤 매콤한 낙지무침을 품 안에 꽉 안아 숙성된 맛을 냈으리라. 이 음식은 쌀막걸리의 느낌을 내는 와인을 찾는 숙제를 안겨줬다.

다음은 낙지구이다. 양념이 제대로 밴 낙지구이가 상을 차지하자 ‘알레그리니 발폴리첼라’(이탈리아)가 등장한다.

발폴리첼라는 이날의 유일한 레드 와인. 그런데 궁합은 가장 실망스러웠다. 가벼운 바디와 입 안을 지배하지 못하는 탄닌은 낙지구이와 겉돈다.

같은 알레그리니에서 만든 ‘팔라조 델라 또레’였다면 묵직한 느낌과 이탈리아 와인 특유의 기분 좋은 산도로 멋들어지게 어울렸을 텐데.

하지만 실망은 잠시. 비장의 카드는 역시 맨 마지막에 등장했다.

‘카트눅 파운더스 블록 샤르도네’(호주)가 그것. 스모키한 오크향이 일품인 이 와인은 버터링을 연상케 한다. 오크 숙성으로 나는 버터 냄새는 매혹적이다. 이는 낙지구이의 매콤 달콤한 맛을 포근하게 안았다. 낙지구이를 씹는 맛은 풍성해지고, 입 안에서 맴돌다 코끝까지 발산하는 스모키 향은 식감을 고조한다.

자리가 파할 무렵, 요즘 와인의 매력에 푹 빠져 산다는 허 화백이 지인들과 만날 때는 어떤 술을 마시는지 궁금했다.

그러자 허 화백은 “친구들과 만나면 이렇게 와인 마시기 힘들어요. 다같이 좋아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못 마셔”라고 대답했다.

와인을 마시는데 있어 형식을 따지고 부담감을 갖는 사람들이 국내에는 아직 많은 듯하다. 하지만 와인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술 일 뿐이다. 레스토랑에서는 와인 잔에 우아함을 느낄 수 있지만, 고기 집에서는 맥주잔에 따라 마실 수도 있다.

규칙은 함께 한 사람이 만들고, 이들이 행복하면 된다. 이날 허 화백과 함께 한 자리는 양말을 벗은 채 진행됐다. 이렇게 마실 수 있는 게 와인의 또 다른 매력이다.

이길상 기자 juna109@donga.com

한국국제소믈리에협회 정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