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고위공직에 임명되려는 사람은 백악관 인사책임자와 면담을 거쳐야 한다. 면담을 무사히 통과하고 나면 60쪽이 넘는 개인정보진술서(personal data statement)를 작성해 제출해야 한다. 학창시절을 증언해줄 고교 친구들의 이름과 연락처, 그동안 살아온 모든 주소, 지난 15년간 다녀온 해외여행 행선지와 목적도 기술한다. 이를 토대로 연방수사국(FBI)과 국세청(IRS) 등이 2∼8주에 걸쳐 시골마을이나 이혼한 배우자까지 찾아다니며 샅샅이 조사를 한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지난달 13일 “(미국의 공직자) 검증절차는 악몽”이라고 불평했을 정도다.
▷청와대가 정부 고위직 개편을 앞두고 후보자들에게 100여 항목의 질문이 담긴 자기진술서를 받고 있다. 진술서엔 ‘10만 원 이상 접대를 받은 적이 있는가’ ‘사채(私債)를 가장한 후원금을 받은 일이 있는가’ ‘과거 부적절한 이성관계는 없었는가’ 같은 인생 고해성사 수준의 체크 리스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청와대가 이처럼 까다로운 자기진술서를 요구하는 것은 천성관 검찰총장 후보자의 낙마 이후 정부 기류와 관련이 있다.
▷재산형성 세금 병역 논문 국민연금 의료보험 위장전입을 비롯해 인사청문회를 전후한 ‘낙마사고’의 소지를 후보자 스스로 1차 점검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청와대는 설명한다. 청와대가 어렵사리 출중한 역량을 갖춘 인물을 찾아내도 깐깐한 인사검증에 겁을 먹고 “난 공직에 관심 없다. 빼 달라”고 사정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정부 안팎에선 “이처럼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 안 걸릴 사람이 누가 있느냐” “가용 인재풀이 너무 좁아진다”는 불평이 나온다.
▷높아진 국민의 도덕기준 때문에 고위직 인선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이 다수 국민에겐 이익이 될까. ‘이슬만 먹고산’ 도덕군자는 성직자로는 최적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복잡한 공직을 수행할 능력까지 갖고 있다는 보장은 없다. 현 정권은 야당과 일부 국민으로부터 ‘부자정권’ 낙인이 찍히자 재산이 20억, 30억 원 이상이면 거의 ‘결격’으로 기피할 정도라고 한다. 공직자의 도덕성이 중요하긴 하지만 무조건 ‘부자는 안 된다’는 식이면 결국 국민에게 돌아갈 부작용도 만만찮을 것이다.
박성원 논설위원 swpark@donga.com